시절이 혼탁한 말세의 중생들은 불교에 대해서 두 가지 집착을 일으키기 쉽다고 한다. 첫째는 부처님께서도 일체 번뇌를 끊고 성불하셨으면서도 끝내 입멸에 들었는데 우리 중생들이 갖은 노력을 다하여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집착이다. 둘째는 생사는 곧 열반이라고 하여 우리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므로 이제 수행이 필요없다고 함부로 행동하는 자들이다. 천태학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열반경》의 가르침으로 다시 공부해야 한다고 그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이 두 가지 문제 대한 《열반경》의 설명을 들어보면, 첫째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가셔서 항상 영원히 계시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생사고해를 보인 것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생사고해의 중생들도 모두 부처가 될 성품인 불성이 있으므로 보리심을 내어 불도를 닦으면 모두 성불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계로부터 다시 시작해서 부지런히 정진해 갈 때, 중생들이 이러한 불성의 이치를 알아서 본래 갖추어진 불성을 깨달으면 곧 부처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성을 밝힌 《열반경》에서는 다시 두 가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하나는 누구나 불성을 항상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다고 집착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서 그런 불성이 있다면 어째서 일천제들은 선근을 끊고 지옥에 떨어지느냐면서 불성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불성에 대한 두 가지 집착에 대해서 《열반경》에서는 불성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뜻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먼저, 우리는 언제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불성이 있다고 집착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만약 중생들이 불성이 없다면 어떻게 아뇩보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는 정인불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니구타씨에 니구타 나무의 성품이 없는데 어떻게 니구타라 부르겠느냐는 것이다. 또 본래 불성이 있었다면 어찌 요인불성이나 정인불성을 요구하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부처님은 불성에 대한 집착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타파한다. 만약 불성이 작아서 보지 못했다면 큰 불성은 볼 수 있고, 티끌이 작아서 볼 수 없다면 화합하면 볼 수 있으며, 니구타 씨에 성품이 있어서 니구타 나무가 되었다면 씨를 태우면 성품이 없어지니 그 타는 성품도 본래 있어야 하는데 이 타는 성품이 본래 있었다면 어떻게 나무가 자라겠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성품이 본래 나고 없어지고, 한꺼번에 없어지는 등의 이런 불성은 없는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성이라는 본래 성품이 없었으나 인연으로 생긴 것이 된다. 마치 불의 인연으로 불이 되고, 물의 인연으로 물이 되는 것과 같다.

한편, 불성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타파하고 있다.

첫째, 업행(業行)에 의한 불성의 논란이다. 우유 속에 타락의 성품이 없고 니구타나무에 나무의 성품이 없듯이 사람이나 하늘이나 정해진 성품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품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천인이 되기도 하고, 천인이 다시 사람이 되기도 하거니와 이는 업의 인연으로 되는 것일뿐 성품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천인이 하늘이 되기도 하여 보살마하살도 업의 인연으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한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타파한다. 중생에게 만약 불성이 있다면 인연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우유 속에서 타락이 되는 것을 들었는데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곧 우유에 다섯 가지 인연이 화합하여 생소(生酥)를 이룬다고 하는 것은 우유 속에 생소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치 돌이 사대로 되어 있으므로, 이를 제련하면 금도 나오고 은도 나오고 구리도 나오고 철도 나오는 것과 같이, 중생들도 여러 가지 복덕과 여러 가지 공력을 들인 후에야 부처가 나오는 것과 같다. 돌에 있는 금의 성품을 금이라고 하지 않듯이, 중생이 가지고 있는 불성을 부처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음이다. 우리가 이러한 성품을 보지 못하는 것은 모든 인연이 화합하지 않아서이니 정인(正因)과 연인(緣因)의 인연으로 아뇩보리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인은 불성이요, 연인은 보리심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

둘째, 단선근(斷線根)에 의한 불성의 논란이다. 사람들이 불성이 있다면 어떻게 일천제가 선근을 끊고 지옥에 떨어지며, 만일 보리심이 불성이라면 일천제들이 이를 끊지 못할 것이다. 끊을 수 있다면 이는 불성이 영원하다고 할 수 없고 영원하지 않다면 불성이라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일천제의 경우는 선근을 끊어 지옥에 떨어진 것이요, 보리심이 불성이라고 할 수 없다. 만일 보리심이 불성이라고 하면 일천제들을 일천제라고 이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셋째, 퇴전과 불퇴전에 의한 불성의 논란이다. 만약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면 어째서 처음으로 보리심을 낸다고 하며, 또 비발치(퇴전) 또는 아비발치(불퇴전)라고 하는가. 만약 비발치라고 한다면 불성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불성이 없다는 집착에 대해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파하고 있다.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면 처음 보리심을 내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보리심이란 마음은 불성이 아니요, 마음은 무상한 것이며 불성은 항상한 것으로, 중생들에게 불성은 항상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비발치하는 것은 마음이 퇴전한다는 것이요, 퇴전하면 아뇩보리를 이룰 수 없거나와 이런 마음이 있는 자는 더디게 아뇩보리를 얻을 뿐이라고 하였다.

넷째, 승보(僧寶)에 의한 불성의 논란이다. 승보는 항상하다고 하였고 항상하다면 무상이 아닐 것이며, 무상이 아니라면 어째서 아뇩보리를 얻는다고 하는가. 또 승보가 항상하다면 어째서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박은 다음과 같다. 이 주장은 승보가 항상 하다면 중생에게 불성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승가는 화합(和合)이라는 말이다. 화합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승단의 화합이요, 둘째는 법(法) 화합이다. 승단의 화합은 세간의 화합과 제일의의 화합이 있다. 세간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은 세간의 화합이고, 이들은 성문승(聲聞僧)이다. 다음으로 제일의의 화합은 보살들의 보살승(菩薩僧)이다. 여기서 세간 승단은 무상하지만 불성은 항상하며, 불성이 항상한 것처럼 제일의 승단은 항상하다. 또 법의 화합은 십이부경을 말하는데 십이부경이 항상하므로 법승(法僧)도 항상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승은 화합이라 하고, 화합은 곧 십이부경 중의 십이인연 등의 법을 가리킨다. 십이인연 등의 법 가운데 불성이 있으며 십이인연은 항상한 것이요, 불성도 항상하므로 승가에 불성이 있다고 한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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