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사(結社)란 뜻을 같이하는 도반(道伴)들이 자기네의 신앙에 대한 수행을 위하여 맺은 단체라는 의미로서 이러한 모임의 사원(寺院)은 사(寺)가 아닌 사(社)라고 불렀다. 주지하듯이 결사는, 불교가 그 시대에 반하여 각종 폐단을 극명하게 노출하는 등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에, 뜻있는 불승(佛僧)들이, 일종의 수행 공동체를 결성하여, 절집 본래의 가풍을 회복(回復)하고 진작(振作)하고자 하는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1)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교사에서 최초로 회자되는 신앙결사(信仰結社)는 동진(東晋)의 혜원(慧遠, 334~416)이 주도한 백련결사이다.2) 혜원은 여산(廬山)에 온지 22년째가 되는 402년 여산 동림사(東林寺)의 아미타불상 앞에서 123명의 승속(僧俗)과 함께 서방정토 왕생을 기원하는 염불결사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결사이다. 정토신앙(淨土信仰)과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중시한 혜원의 결사는 결사운동의 전형적이며 이상적인 모습으로 인식된다.3) 물론 혜원이 생존했을 당시에는 이와 같은 결사의 명칭이 사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가 결사적 형태의 신앙운동을 전개했으며 그것이 기록상 등장하는 최초의 결사라는 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4)

혜원의 백련결사 성립배경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사회적 혼란기를 배경으로 하여 성립되었다.5) 혜원은 불승들이 마땅한 수행처를 마련하는 것조차 어려웠던 혼란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스승 도안(道安)과 헤어지고 난 후 우여곡절 끝에 마련한 동림사는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도량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며, 백련결사는 이와 같은 인식 속에서 결성된 신앙공동체 운동이었다.

둘째, 밖에서 불교계를 압박하는 것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성립되었다. 환현(桓玄)은 동진(東晋)의 권력을 장악한 이후 수행자적 모습을 상실하고 있는 승려들을 색출하여 그들을 승단에서 내쫓는 사태를 감행하였다.6) 또한 승려를 국가 권력에 복속시키고자 국가불교적인 입장을 주장하여 사문(沙門)도 왕(王)에게 예경(禮敬)해야 한다는 왕배론(王拜論)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혜원의 노력은 논리적 저항과 수행풍토의 진작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셋째, 현실 불교의 타락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 개혁을 위해 결사를 성립하였다.7) 혜원은 불교 승려들의 타락상을 극복하는 것이 곧 불교의 자존과 발전을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두 개인의 노력보다 많은 대중의 참여가 필요하였을 것이며, 그 결과 사부대중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적 신앙운동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는 청정한 대중생활의 모습을 꾸준히 실천해 가면서 불교 비판론자들의 시각이 교정될 수 있기를 기대하였을 것이며, 아울러 제 길을 가지 못하고 있는 타락한 집단에게도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나름대로 기대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백련결사는 이후 결사운동의 전범과도 같이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불교가 고비에 처할 때마다 결사적 형태의 수행이 유행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8)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소규모의 신앙결사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불상 조성 등을 위해 수십 명 단위의 신앙결사가 조직되었는데, 충남 연기지방에서 조성된 불비상조상기(佛碑像造像記) 등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 하대에는 불교의 대중화와 관련하여 ‘결사’라 이름붙인 집단적인 수행이 중앙과 지방에서 행해졌다. 중앙에서는 중앙교단이나 왕실·귀족들이 주도했는데, 화엄종을 중심으로 신앙결사가 왕성하게 전개되었으며, 이차돈(異次頓)이나 의상(義湘) 등 조사(祖師)를 추모하기 위한 결사 모임도 있었다. 지방사회에서는 향리나 촌주(村主) 등 지방 토착세력을 중심으로 불사(佛事)를 운영하고 신앙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오대산 신앙결사처럼 복합적인 체계를 갖추고 다양한 경전 강독과 예참신앙을 실천하는 모습도 확인된다.

고려시대에는 무신정권기에 지방에서 결사운동이 일어나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 13세기 전후의 고려사회는 정치․사회적으로 대단한 격동기였다. 이것과 맞물려 불교계 내부에서 많은 자각과 반성이 있게 되고, 신앙결사 운동으로 농축된다. 화엄종의 반룡사(盤龍社), 법상종의 수정사(水精社)를 시작으로 하여,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이 개창한 수선사(修禪社)와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 1163~1245)가 중심이 된 백련사(白蓮社)에서 일어난 결사운동(結社運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129년(인종 7)에는 법상종(法相宗)의 승려 진억(津億)이 지리산에 오대사(五臺寺)를 지어 수정결사(水精結社)를 열었다. 이 결사에는 3,000여 명이 참여하였으며, 󰡔점찰업보경(占察業報經)󰡕에 의해 선악을 점찰참회(占察懺悔)하여 극락왕생을 기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사의 이름을 수정결사라고 한 것은 무량수불상 앞에 수정 1개를 놓고 각자의 명신(明信)을 밝혔기 때문이다.9)

1197년(명종 27) 이의민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최충헌은 명종과 연결된 왕자 출신의 승려들인 소군(小君)을 궁중에서 쫒아내고, 이인로(李仁老)의 숙부이자 승통인 흥왕사의 승려 요일(寥一)을 영남 지역으로 쫓아냈다. 요일은 명종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어 조정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최충헌에 의해 영남 지역으로 쫓겨난 것인데, 그는 고령의 미숭산 반룡사에 내려와 주석하면서 화엄 결사를 결성한다. 요일에 의해 결성된 반룡사 결사 운동은 명종에게 신임을 받던 요일이, 최충헌이 정권을 잡자 영남 지역으로 쫓겨나 일으켰고, 화엄종 계통의 결사 운동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결사 운동과 성격을 달리 한다. 왜냐하면 고려시대의 결사 운동은 불교가 당시 사회에서 이념적·윤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한계를 자각하고 반성하여 이를 개혁하려는 사회 변혁 운동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10)

고려의 결사 운동은 대체로 중앙 집중적인 교단 체제에 대해 독자적인 지방 불교의 형태를 지향하였다. 주도 세력 및 구성원은 주로 신앙상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개인적 차원에서 참여하였으며, 대체로 지방의 일반민과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중간 신분층 및 독서층의 참여와 후원으로 결성되고 유지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종교적 의미에서나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볼 때, 역시 본격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수선사와 백련사’의 결사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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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사(結社)의 사전적 정의는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회적인 결합 관계를 맺음, 또는 그 단체”, “2인 이상의 동지가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합의에 의하여 조합을 만듦, 또는 그 단체” 등이다.
2) 《출삼장기집전(出三藏記集傳)》 하권 제15, <혜원법사전(慧遠法師傳)> 제3, 대정장(大正藏) 55, p.109c. “法師釋慧遠, 貞感幽冥宿懷特發. 乃延命同志息心淸信之士百有二十三人, 集於廬山之陰般若臺精舍阿彌陀像前.”
3) 백련사 염불결사는 아직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 전역되기 이전이었으므로,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에 의한 정토신앙이었다. 《관무량수경》은 424년에 역경승 강량야사(畺良耶舍)가 한역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의 경우, 산스크리트 원본은 100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일반에 공개된 것은 네팔에 전해 내려오는 여러 사본들을 대조하여 M. 뮐러와 난지오 후미오(南條文雄)가 편집·출간한 《Sukhavativyuha, Description of Sukhavati, the Land of Bliss》(2권, 1883)가 최초이다. 《반주삼매경》은 정토교 계열의 대승불교 경전이다. 초기 대승경전에 속하며 아미타불 신앙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무렵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루가참의 179년 3권 본 번역이 널리 유포되었다. 이 경전에 의하면, 보살이 반주삼매를 행하면 모든 부처가 나타나는데, 이를 위해서는 신심을 깨뜨리지 않고,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고, 지혜가 수승해야 하며, 선지식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한다. 정토계 경전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4) 김상영, <결사운동을 통해 본 불교개혁의 성격>, 《불교평론》 4호(불교시대사, 2000), pp.132∼135.
5) 혜원이 생존해 있던 시기는 중국 전체 대륙이 전란에 휩싸여 있던 남북조시대에 해당한다.
6) 398년부터 동진의 권력을 장악한 환현은 402년에 이르러 출가 사문의 왕에 대한 예경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문의 사태(沙汰)까지 단행하였다.
7) 이 시대의 불교 교단은 사회에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혜원은 이와 같은 상황을 인식하고 승려 본연의 모습을 보이고자 결사적 형태의 수행을 추진하였을 것이다.
8) 김상영, 위의 논문, pp.136∼143.
9) 권적(權適) 찬(撰), <지리산수정사기(智異山水精社記)>, 《동문선(東文選)》 64권.
10) 진성규, <고려 후기 수선사의 결사운동>, 《고려 후기 불교 전개사 연구》(민족사, 1992), pp.82∼86.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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