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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초기불교의 차별금지법
차별 금지는 중도의 사회적 실천
2017년 04월 06일 (목) 13:59:24 조준호 yathabhuta@hanmail.net

최근 다시금 차별금지법의 입법이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고 있다. 불교는 누구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음을 여러 가지 방면으로 설한다.

필자는 불교의 인권사상과 관련하여 차별금지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함을 논문을 통해 주장한 바가 있다. 하지만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의 입법화를 여러 번에 걸쳐 시도하였지만 빈번히 좌절되었다. 기독교와 일부 보수단체의 거센 반발로 현재까지 제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계는 표를 의식하여 계속 눈치를 보고 있다. 불교계에서는 조계종이 공식적으로 종단적 차원에서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박광서 교수와 이혜숙 교수가 오래전부터 운동차원으로 입법화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더 좋은 사회,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할 이유가 많다. 인종이나 국적, 지역, 종교 또는 성별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차별받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새로운 괴로움이 양산되고 증폭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다름에 대한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차이가 곧 차별로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현대의 선진적인 인권사상이며 2,600년 부처님의 사상이기도 한다.

초기불교의 인권 사상은 차별해서도 안 되지만 차별받아서도 안 된다는 사상을 펼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당시의 바라문교가 인간을 차별하는 데에 반대해 사성평등의 주장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삼종외도설에 이어 오종외도설에는 출생설(出生說)이 있다. 부처님은 출생설의 외도 비판을 통해 어떠한 종류이든 출생 또는 출신 성분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도 정의롭지 않다고 했다. 부처님은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관의 깨달음을 통해 당시의 사성계급제도 등의 차별제도를 다각도로 비판한다. 정의로운 세계에 만중생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자비심의 실천인 것이다.

차별금지법과 관련하여 초기불교의 아주 중요한 경이 있다. 다름아닌 이변(二邊)의 중도(中道)를 설하는 초기경전 가운데 《Majjhima Nikaya》의 《Araṇavibhaṅga Sutta》와 상응하는 한역 《중아함》의 《구루수무쟁경(拘樓瘦無諍經)》 이 그것이다. 놀랍게도 아직까지도 이 경에 담긴 사회 실천적 의미를 제대로 거론하지 못하고 있다.

이 경은 중도를 설하는 초기경전의 다른 경처럼 이변의 중도와 중도로서 팔정도를 제시한다는 점은 같다. 그런데 제목에서 이미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경은 사회실천 의미로서 평화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 중도의 사회실천 의미로서 차별금지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 경명은 ‘다툼이 없는 무쟁(無諍)에 대한 분석의 가르침’인데 그 내용으로는 중도를 제시하고 있다. 한역의 무쟁은 빠알리 Araṇa-vibhaṅga가 그 원어이다. Araṇa는 raṇa가 싸움을, 그리고 접두어 a가 부정의 의미로 ‘무쟁’ 또는 ‘평화’를 의미한다.

《Araṇavibhaṅga Sutta》와 《구루수무쟁경》은 내용에 있어 불이(不二)의 중도를 설한다. 불이란 다름아닌 상대적인 양변(兩邊)인 우열(優劣), 빈부(貧富). 귀천(貴賤). 미추(美醜). 정(淨)과 부정(不淨), 다소(多少), 고하(高下), 장단(長短) 등을 말한다. 이러한 이변의 중도 가르침이 어떻게 사회적 실천으로 확장되는지를 《Araṇavibhaṅga Sutta》와 《구루수무쟁경》 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극히 하천(下賤)한 업이고 범부의 행인 탐욕의 즐거움을 구하지 말고, 또한 지극히 괴롭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이치와 서로 걸맞지 않는 자신의 고행(苦行)도 구하지 말라.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면 곧 중도(中道)가 되나니, 그것은 눈을 이루고 지혜를 이루어 자재로이 선정[定]을 이루며,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또 칭찬하는 경우도 있고, 꾸짖는 경우도 있으며, 칭찬도 꾸짖음도 없이 사람을 위해 설법하는 경우도 있다. 재(齊)를 결정하며, 결정된 사실을 안 뒤에는 언제나 마음속의 즐거움을 구하라. 서로 끌어 들여 말하지 말고, 또한 면전에서 칭찬하지도 말며, 절도 있게 말하고 절도 없이 말하진 말라. 그 나라의 풍속과 법을 따라 옳거니 그르거니 따지지 말라. 이것이 분별무쟁경(分別無諍經)이니라.”

이 경은 중도적 삶의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 잘 보여준다. 차별금지법의 초기경전적 근거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경에서는 차별이 금지되어야 할 근거로서 중도법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람간의 관계 속에서 “서로 끌어 들여 말하지 말고, 또한 면전에서 칭찬하지도 말며, 절도 있게 말하고 절도 없이 말하진 말라”는 마음속에 우열과 시비를 떠나 있기에 분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을 말한다. 즉 외모의 미추(美醜)나 빈부라는 이변에 따른 차별심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잘 생기고 못 생겼다는 우열과 미추의 시비는 바로 차별로 나타난다. 이를 떠난 평등심은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이변의 심리상태를 벗어났을 때만이 가능한 경지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경전은 중도의 사회적 실천으로서 차별금지의 지침을 더욱 분명하게 설한다. 

먼저, 이 나라 저 나라 국경을 넘나들며 유행할 때 “그 나라의 풍속과 법을 따라 옳거니 그르거니 따지지 말라”고 한 것이다. 흔히 이 구절은 출가자의 일반 사회에 비참여적인 태도나 출세간적인 자세로 이해되기도 한다. 나아가 출가자의 소극적인 사회 참여의 근거처럼 잘못 읽히고 이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경전에서 설하는 중도 가르침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오류이다. 반대로 이같은 가르침의 맥락은 대단히 적극적인 ‘사회실천적 중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원래 의미는 출가자가 세간의 풍습과 법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방관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확하게 요즘 표현으로 바꾸면, ‘문화적 상대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매우 적극적인 의미의 사회적 실천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른 문화와의 차이를 서로 인정하지 못하고 배타적으로 차별하고 대립하며 싸움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다. 이로써 집단 간, 국가 간, 문화권 간에 전쟁이라는 극단의 폭력도 불사해 오고 있다. 때문에 현재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은 물론 문화적 폭력(cultural violence) 개념으로 논의되기도 한다. 이처럼 차별은 모든 종류의 폭력을 연기(緣起)한다. 폭력은 단지 물리적 폭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샤무엘 헌팅톤의 《문명의 충돌》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서로 다른 문명권 또는 문화권 사이의 차별로서 갈등과 충돌도 있다. 때문에 헌팅톤의 저서는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구루수무쟁경》에서도 다른 문화 간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은 결국 고통과 상처 그리고 비탄과 고뇌를 일으킨다고 한다.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열(優劣)개념에 바탕한 차별은 다름아닌 문화배타주의나 패권주의이다. 아직도 개인은 물론 인류 사회의 고질적인 병으로 이어져 온다. 우열이라는 이변에 따라 한 가지를 고집하고 집착하여 다른 것을 배타적으로 대한다.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번뇌이고 차별이다.

경전에서 보여주듯이 부처님은 중도 가르침의 맥락에서 “그 나라의 풍속과 법을 따라 옳거니 그르거니 따지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서로간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함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중도 정신의 사회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차이는 지혜로 알되 번뇌로 차별하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때문에 붓다는 이를 설하면서 곧바로 이전에 설했던 《분별무쟁경(分別無諍經)》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경전 안의 또다른 경전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분별무쟁경》은 ‘다툼이 없는 무쟁(無諍)에 대한 분석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앞서 설명한 ‘Araṇavibhaṅga’라는 말을 그대로 옮긴 한역이다. 경명에서부터 무쟁은 폭력이 없는 비폭력을 말한다. 즉 문화적 차이를 우열의 이변으로 차별하여 다툼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불교에서 중도는 차별의 소지를 떠난 반야지혜로 강조된다. 즉 중도 정신에 의하면 서로 간 차이는 이해하고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 자세야말로 바로 반야지혜이고 중도라는 것이다. 이는 자기와 다른 삶과 문화를 우열로 차별하지 않는 자세가 바로 중도이고 팔정도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도는 다툼이 없는 평화라는 대단히 적극적인 가르침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차별금지의 중도 가르침은 현재 진행형인 다문화시대에 더욱 요청되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문화학자들에 따르면 과거 인류는 영토전쟁의 폭력이, 근대에는 이데올로기 전쟁이 있었지만 미래에는 문명과 문화의 충돌로 인한 폭력이 심화 될 것으로 예견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언어와 풍습과 법 등에서 문화적 상대성을 인정하는 불교의 중도는 사회실천적 입장에서도 인류사회에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아가 점차 인권의식이 깨어나 차별금지법의 입법이 강조되고 있는 현재 국내 상황에서도 제고되어야 할 것이다.

조준호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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