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제주도 성당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은 개인적으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다가 가슴에 칼을 맞고 죽은 신자에 관한 기사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만약 하나님을 믿는 종교의 신자라면 신에 대해서 정말 회의감을 느낄 것 같습니다. 가슴에 칼을 맞고 죽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너무나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당에서, 그것도 기도를 하다가 이런 끔찍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방관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인데, 자신의 공간에서 자신을 따르는 백성이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도록 내버려 둔 것에 대해서 신에게 분노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의 존재를 강하게 의심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교리적 깊이가 없지만 신자들을 통해 이해한 바로는, 하나님은 유일신이고, 전지전능하고, 세상을 만드셨고, 하나님을 통해서만 천국에 갈 수 있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인간 삶의 전반에 하나님이 관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의 바탕 위에서는 앞에서 일어난 성당사건이나 계모에게 학대받다가 죽은 아이들의 경우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들이 고통 받고 있을 때 신은 도대체 왜 보고만 있는 것일까, 하고 의문이 듭니다. 벨기에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는 인간의 고통에 방관하는 신을 신랄하게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런 신관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영화 <사일런스>(미국, 2016)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했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하나님은 불성에 가까웠습니다. 주인공이 극한의 고통에 빠져서 “왜 우리가 이렇게 고통 받고 있는데 침묵하십니까?”라고 원망 섞인 질문을 했을 때 하나님은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찬양하든 배신하든, 매순간 인간과 더불어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부처고 그렇지 못하면 중생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불성을 갖고 있지만 스스로가 그걸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 불성의 자리에 하나님을 갖다 놓아도 전혀 불편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도 특별했습니다. 주인공이 하나님을 부정해야 하는 순간, 하나님은 비로소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하나님에 대한 모든 관념을 부정해야 하는 순간이 돼서야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금강경》에서 ‘모든 상(相)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와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을 만나는 순간은 신에 대한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때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영화의 원작자인 엔도 슈사쿠가 일본인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토착신앙인 신도와 불교가 국민적 종교로 자리 잡은 나라입니다. 이런 풍토 안에서 성장한 작가는 일본인으로서 갖게 된 의식 구조와 가톨릭 사이에 균형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침묵> 이라는 소설에서 그는 다분히 불교적인 신관을 보여주었습니다.

<침묵>을 원작으로 한 영화 <사일런스>는 세계적 거장인 마틴 스콜세지에 의해 영화화 됐는데, 감독 또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지만 감독은 일찍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 이라는 영화에서 예수를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묘사해 기독교인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은 바 있습니다. 이 영화 <사일런스> 또한 사뭇 다른 신관을 보여주는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기존 신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기 보다는 진지하게 신을 탐색하는 스타일의 종교인인 것 같습니다. 그는 또한 우리 불자에게는, 14대 달라이 라마에 관한 이야기인 <쿤둔>을 만든 감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영화 <사일런스>는 종교적 성찰이 가득한, 심오한 종교영화였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17세기 에도 막부시대입니다. 이 시기는 일본에서 가톨릭이 확산 추세였는데 막부는 가톨릭에 대한 거부감이 컸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라는 게 밝혀지면 무조건 사형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외국인 신부에 대해서는 개종을 독려했습니다. 신자들은 무조건 죽이면서 그들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신부를 개종시키는 것은, 나름의 치밀한 전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로 섬겼던 신부의 배신은 신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종교를 유지할 동력을 상실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신부를 설득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습니다.

포르투갈의 젊은 신부 로드리게스(앤드루 가필드)는 자신의 스승이자 신앙의 나침판이었던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가 일본으로 선교를 떠났다가 거기서 개종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스승이 자신의 종교를 배신하고 지금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책을 쓰면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스승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소문으로 떠도는 스승의 배교도 확인하고, 선교를 하기 위해 다른 수사인 가르페(애던 드라이버)와 함께 일본으로 왔습니다.

나가사키 현은 특히 종교적 박해가 극심했습니다. 가톨릭을 믿는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나가사키 현의 이노우에 수령(이세이 오가타)은 가톨릭 신자를 신고하면 은전 100냥의 은전을, 교단을 신고하면 은전 200냥을, 신부는 은전 300냥을 포상금으로 내걸 정도로 가톨릭 색출에 굉장한 열의를 보였습니다. 물론 이렇게 가톨릭 신자인 것이 밝혀지면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나가사키현은 유황온천지대라 들판에 뜨거운 온천수가 뿌연 수증기와 함께 흘렀는데 팔팔 끓는 뜨거운 물을 작은 구멍이 뚫린 바가지에 받아 얼굴에 끼얹었습니다. 뜨거운 물이 떨어지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렇게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신자들은 죽었습니다. 아니면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 예수처럼 나무에 매달아 두면 바닷물을 계속 들이키다가 몇날며칠 굶고 목말라 죽기도 했습니다. 단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이렇게 이들은 고통 받았지만 신자들은 파라다이스를 꿈꾸면서 기꺼이 죽었습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깊은 회의감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이 일본에 오지 않고, 일본에 가톨릭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이들은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될 텐데 자신들 때문에 이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 같아 종교적 회의감마저 들었습니다.

“절망하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두렵습니다. 당신의 침묵의 무게가 두렵습니다. 기도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허공에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기도해도 대답하지 않는 신의 침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게 이 영화를 관통하는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데 정말 신이 있다면 왜 침묵하는가,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있을 때 다른 신자들도 함께 잡혀있었는데 이노우에 수령은 로드리게스 신부가 가톨릭을 부정하고 불교 신자가 되면 다른 신자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신부는 거꾸로 매달려 조금씩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가며 내뱉는 신자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정말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벽을 치며 애타게 불렀지만 신은 여전히 침묵만 지켰습니다.

로드리게스 신부는 다음날 신을 배신하기로 했습니다.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노우에 수령은 배교의 행위로 예수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밟는 행위를 시켰는데 순간 그는 갈등했습니다. 그때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나니, 밟는 너의 발이 아프고,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밟아라, 밟아도 좋다. 네 발 속의 극진한 아픔을 나만은 이해한다.”

지금까지 로드리게스는 신앙의 상징인 성물을 지키기 위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데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기껏 동판에 새겨진 그림에 지나지 않는데 사람의 목숨보다도 그걸 더 소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은 신이고, 신에게 헌신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신에 대한 헌신과 인간에 대한 연민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왔고, 지금까지와 다르게 로드리게스가 신을 버리고 인간을 선택했을 때 신은 비로소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사일런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예수가 그려진 동판을 밟아야 하는 상황에서 르드리게스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배교하는 상황에서 신을 체험한 것인데, 왜 이런 아이러니가 가능할까요?

지금까지 로드리게스의 신은 관념이었습니다. 자주 인용되는 예시이지만, 레몬 맛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레몬 맛을 설명해봤자, 그건 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드리게스에게서 신 또한 《성경》을 통해, 설교를 통해 알지만 스스로 경험한 게 아니기 때문에 관념일 뿐입니다. 그는 관념적 세계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관념 속에서는 아무 것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의 고통소리를 들으면서 깨어났습니다. 관념에서 ‘지금’으로 돌아왔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비명 소리에서 통렬한 아픔을 느꼈고, 자신의 고통처럼 생생하게 그 아픔을 경험하면서 ‘나’라는 에고에서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신’을 버렸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의 동료가 그랬던 것처럼 차라리 죽음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목숨보다 소중한 신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야 신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말하는 신은,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며, 또한 신은 현실과 닿아있으며, 나를 버릴 때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불교의 선적 체험과 닮았습니다.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무심이어야 하고, 순간에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화 <사일런스>를 통해 크리스트교의 새로운 신을 경험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신관 보다는 합리적입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