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차(名茶)와 공차(貢茶)

중국 역대왕조에서 황제에게 바쳐진 조공한 명차들은 그야말로 모두 정사에 기록된 역사적인 명차(名茶)에 속한다. 이외에도 비록 공품(貢品)의 반열에는 끼지 않았을지라도 중국 전역의 각 차산지에서 생산된 품질이 우수한 차들이 있는데, 모두가 당대(當代)의 문인(文人)과 아사(雅士) 또는 명인(名人)들이 ‘명차(名茶)’라고 호평과 극찬한 차들이다. 이 지방색을 띤 명차들 또한 다른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역시 역사적인 명차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중국의 명차의 형성과 발전은 공차(貢茶)와 서로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

1. 공차(貢茶)의 기원

‘공차(貢茶)’는 옛날 중국 황실에서 황제와 황족들만 마시는 차를 특별히 제작하여 조공한 것을 뜻한다. 이는 ‘차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특이할 만한 역사적 현상일 뿐만 아니라, 아울러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공차(貢茶)의 기원’을 말하기 전에, 먼저 ‘공(貢)’자를 살펴보면, 《상서(尙書)》 공영달(孔穎達)의 주(注)에서 “‘공(貢)’은 아래에서 위에 바치는 것을 일컬으며, ‘부(賦)’라는 것은 위에서 아래에 세금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부(賦)’라는 것은 국가에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지방에 징세하는 것이며, 지방에서는 이것을 이행할 법적인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것이다. 반대로 ‘진공(進貢)’이란 각 지방에서 중앙정부에 자발적으로 그 지역의 생산품이나 특산품을 바치는 행위를 뜻하며, 그 수량의 제한이나 품종의 규정이 없으며, 대체로 다른 지방에서 구하기 힘든 그 지방의 희귀하고 진귀한 품목들이 대부분 조공으로 바쳐진다. 옛날 중국에는 소위 ‘구공(九貢)’이란 제도가 있었는데, 조공하는 품목 아홉 종류를 의미한다.

①제사에 필요한 소와 양, 돼지를 바치는 ‘사공(祀貢)’, ②동물의 가죽이나 견직물(帛)을 바치는 ‘빈공(嬪貢)’, ③은(銀)이나 철(鐵), 석경(石磬), 단칠(丹漆) 등을 바치는 ‘기공(器貢)’, ④자수를 놓은 견직물이나 옥(玉), 말〔馬〕 등을 바치는 폐공(弊貢), ⑤춘간(櫄杆:참죽나무), 전나무〔栝〕, 오동나무〔柏〕, 조릿대〔筿〕 등을 바치는 ‘재공(材貢)’, ⑥ 금이나 옥, 귀갑(龜甲), 조개〔貝〕 등을 바치는 ‘화공(貨貢)’, ⑦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시(紵)나 가는 견직물〔纖縞〕 등을 바치는 ‘복공(服貢)’, ⑧새의 깃털이나 짐승의 털, 증정용 선물, 진주(珍珠) 혹은 진주처럼 생긴 아름다운 돌(琅玕) 등을 바치는 ‘유공(斿貢)’, ⑨ 기타 조공할 수 있는 지방의 특산물 등을 바치는 ‘물공(物貢)’ 등이 있다. 이중에서 차는 바로 아홉 번째 조공품의 종류인 ‘물공’에 속한다.

진(晋)나라 때, 상거(常璩)가 지은《화양국지(華陽國志)》<파지(巴志)>에 보면,1)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을 정벌하고, 파국(巴國)2)에 있는 주나라 종진(宗姬)에게 아들의 작위를 주어 파자국(巴子國)이라 칭하고 왕으로 봉하였다. 그때 파국(巴國)에서 조공을 받았는데, 거기에 ‘차(茶)’가 조공 품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공차(貢茶)’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주나라 무왕이 은(殷)을 정벌한 시기가 기원전 1,066년이므로 ‘공차’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0 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야 할 것이다.

서한(西漢)의 왕포(王褒)가 기원전 59년에 쓴《동약(僮約)》이라는 노비문서에 “차를 다리는 도구를 전부 갖추고, 무양에서 차를 사왔다.”3)는 기록은 차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무양은 현재 사천성 미산(眉山) 부근인 인수현(人壽縣)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시 상층사회에서 차를 마시는 일과 함께 차가 이미 널리 상품화되어 유통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음차열풍의 사회현상 속에서 공차(貢茶)가 생겨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송대에 이르러, 구종석(寇宗奭)의《본초연의(本草衍義)》에는 “동진(東晋) 원제(元帝, 317년-322년 재위)에 온교(溫嶠:288-329년)가 선성(宣城)에 관리로 있을 때, 공차(貢茶) 1,000근과 공아(貢芽)4) 100근을 적어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현대의 학자 진연(陳椽)이 쓴《차엽통사(茶葉通史)》에 의하면, 유송(劉宋) 때의 산겸지(山謙之)가 쓴《오흥기(吳興記)》에 “절강 조정현(鳥程縣) 서쪽 이십 리에 있는 온산(溫山)에서 어원(御苑)이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5)

이러한 기록들을 미루어 볼 때, 동남지역 차(茶)생산 구역에서도 4세기쯤에 이미 공차(貢茶)가 생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촉(前蜀:907-925년) 때, 모문석(毛文錫)이 쓴《다보(茶譜)》에는 “양주(揚州)의 선지사(禪智寺), 수나라의 옛 궁궐, 사침(寺枕)의 촉강(蜀岡)6)에는 차밭이 있는데, 그 맛이 달고 향기운 것이 몽정차(蒙頂茶)7)와 같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수나라 때에도 공차(貢茶)가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겠다.

공차(貢茶)가 최초로 시작된 것은 아마도 차가 생산되는 지방의 관리가 각종의 특별한 명차들을 세금으로 징수하여 황제에게 지방의 특산품으로 진공(進貢)한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토공(土貢)의 성질을 띤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공차(貢茶)는 민간에서부터 비롯되어 상층사회로 진입한 대표적인 문화적, 사회적 산물인 것이다. 공차는 특히 당나라 때에 이르러 일반적인 토공(土貢)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 정식으로 조공하는 품목인 ‘정공(正貢)’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관배(官焙)’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각종 공차(貢茶)의 모든 제조과정을 관부에서 직접 관리, 감독, 지휘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당나라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황제와 황실에서만 전문으로 음용하는 공차(貢茶)의 품질뿐만 아니라 품종과 차의 빛깔까지도 끊임없이 추구하고 갈구하였다. 이러한 역대 공차(貢茶)의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대한 창조와 발전에 대한 열망과 노력은 제다기술의 발전을 촉진시킴은 물론 이로 인해 더 좋은 품질의 차를 생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아울러 더 많은 양과 종류의 다양한 공차(貢茶) 품목을 양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중국의 차시장 어디를 가든지 ‘공차’가 없는 곳은 없으며, 그 공차는 모든 품종을 막론하고 다 존재하고 있으며, 그 값 또한 매우 높은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 비록 현재의 중국 차시장에서 범람하고 있는 공차가 모두 과거 황제에게 바쳐지던 정통의 공차는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그 공차들이 모두 가짜라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 개방된 이후, ‘공차’가 중국의 상류층과 일반인들, 더 나아가 외국에까지 차의 사치를 부추겨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쨌든 과거 황실의 공차가 존재해 왔기 때문에 민간의 차도 그 품질과 제다의 기술이 날로 발전해 온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중국의 차산업에 있어서 공차(貢茶)의 역할과 영향은 그야말로 지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주)-----
1) 《화양국지(華陽國志)》가 편찬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역사적 고증을 통해 약 347년 전후로 추정된다.
2) 파(巴)는 중경(重慶)을, 촉(蜀)은 성도를 의미한다. 파국은 당시 중경과 성도를 포함한 현재의 사천성(四川省) 일대이다.
3) “팽다진구(烹茶盡具), 무양매도(武陽買荼)” 당시는 ‘차(茶)’가 없어, ‘도(荼)’자로 사용하였으며, ‘도(荼)’자가 씀바귀와 차 두 가지로 뜻으로 쓰이다가 당나라 때 와서야 비로소 ‘차(茶)’자로 독립되어 쓰이게 되었다.
4) ‘공아(貢芽)’란 차의 싹을 조공했다는 뜻이다. 찻잎은 ‘차(茶)’, 차의 여린 싹은 ‘아(芽)’라고 하며, ‘아(芽)’가 더 상등품이다.
5) 《차엽통사(茶葉通史)》, 간체로 《茶叶通史》, 진연(陈椽) 편저(編著), 농업출판사(農業出版社),1984.
6) 촉강(蜀岡): 절강성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풍경 명승지이다. 1988년에 국무원에서 ‘국가중점풍경명승구’로 지정했다.
7) 사천성 아안시 명산현에 있는 몽정산에서 생산되는 차. 세계 최초의 인공 재배 차(茶)이면서, 최초의 공차(貢茶)로 유명하다.

박영환 |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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