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제4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작가에 선정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대표작은 《더 리더(The Reader): 책 읽어주는 남자》이다. 영화화돼 관객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던 《더 리더》는 법철학에 대한 심원한 탐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게 저자는 독일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을 역임한 뒤 여러 대학에서 법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먼저, 간단히 줄거리를 살펴보자.

10대 소년 미하엘은 길을 가던 중 열병으로 인해 심한 구토를 일으킨다. 이를 본 30대 여인 한나가 도움을 준다. 미하엘은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한나를 찾아갔다가 이성애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결국 둘은 연인관계가 된다. 한나는 육체적 관계를 가지기 전에 책을 읽어 달라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는 말 한마디 없이 미하엘을 떠난다. 세월이 흘러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관련 재판에 참관하려고 갔다가 피고인의 신분인 된 한나를 보게 된다. 다른 피고들과 달리 한나는 모든 혐의를 인정한다.

다만 “사건의 주범이었냐”는 판사의 질문에는 부인한다. 그러나 기획서를 누가 썼는지 확인하기 위해 글씨를 써보라고 하자 그제야 자신이 주범이었음을 인정한다. 세월이 흘러 미하엘은 예전에 한나에게 읽어줬던 책들을 육성으로 녹음한다. 그리고 그 테이프를 한나에게 보낸다. 한나는 테이프를 들으면서 독학해서 문맹에서 벗어난다. 출소를 1주일 앞둔 시점에서 둘은 만난다. 그러나 그 만남 이후 한나는 자살하고 만다.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에서 주권권력의 경계 밖에는 벌거벗은 생명인 호모 사케르가 있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것은 시민이 더 이상 정치권력의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되는 근대 민주주의 탄생 과정에서도 호모 사케르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주권자는 법질서의 외부와 내부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주권의 역설’에 기인한다. 언제라도 외부와 내부의 경계는 제도 권력에 의해 상정될 수 있다. 법의 테두리도 제도 권력의 하나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권권력의 경계 밖으로 밀려났다는 점에서 한나는 전형적인 호모 사케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나치즘의 하수인이기에 법정에서는 가해자로 서 있어야 한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로고스(Logos)이다. 재판과정에서 한나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함에도 문맹인 까닭에 무기징역형을 받는다. 그녀는 기소장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폭격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가 쓴 책도 읽지 못한다. 게다가 그녀는 수용소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디아스포라(Diaspora) 즉, 뿌리 없이 떠도는 영혼이다. 소설에서 한나가 독일본토 출신이 아닌 헤르만슈타트 근교 출생인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나는 가족도 친척도 없는,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채 떠도는 부평초와 같은 신세이다.

어쩌면 한나가 제복을 선호하는 것도 제도권 내에 편입되고 싶은 욕구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재판 판결이 있는 날 마치 제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색 정장에 흰 블라우스를 입은 것도, “전차 차장 일이 마음에 드는 까닭은 제복을 입고 활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한나에게는 피붙이 하나 없는 자신을 보호해줄 ‘경계’가 필요했고, 제복을 그 경계의 대용물로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정작 그 제복이 자신과 똑같은 ‘디아스포라’이자 ‘호모 사케르’인 유대인들을 절멸시키는 제국주의의 복장인 줄 알게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경계 밖의 인간을 제도화한 것이 바로 나치즘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놀랍게도 나치즘의 가해자를 경계 밖의 인간으로 상정하고 있다.

한나는 평생 동안 문맹인 것을 숨기며 살아온 여자이다. 제도권 경계 밖의 사람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한나는 설령 무기징역을 받을 지라도 문맹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한나의 감옥과 유대인의 수용소는 주권권력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처소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름을 박탈당하고 숫자로 불려짐으로써 인간이 아닌 사물로 취급받았던 유대인과 애초 문맹이어서 글을 쓸 줄 몰랐던 한나는 동일하다.

한나가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동질의식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죽은 그들이 자주 수용소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이 찾아왔다는 것은 한나의 기억을 통해 현존하게 됐다는 것을 말한다.

영화에서 가장 큰 의혹은 한나의 편지를 받고도 미하엘이 왜 답장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사견이지만 이 해답은 바로 ‘유예(猶豫)’에 있다고 본다. 법적으로 유예란 어떤 사건 결정이나 집행을 미루는 것을 일컫는다. 유예된다는 의미는 다의적이다. 일견 당장 판결이 효력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죄를 축소시키고 면피시키는 것으로도 해석되지만, 판결을 유보한 채 뒤로 미룬다는 점에서는 죄를 과중시키고 지속시키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런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은 ‘유예’는 집행은 미뤄지는 반면 죄는 정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정지된 채 지속된다는 것, 그것은 모든 기억이 지닌 기본 성질이기도 하다. 여기서 ‘기억’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양심의 부름’에 화답하는 ‘상기(想起, Amamesis)’를 일컫는다. 역설적이게도 한나와 미하엘의 대화도, 한나와 피해자들의 대화도 그 기억 속에서만 완성된다.

이 세상의 모든 만남은 첫 번째 만남인 동시에 먼저 살다간 이들의 만남의 답습에 지나지 않다. 이렇듯 모든 인연이란 첫 인연이면서, 되풀이되는 인연이면서, 마지막 인연인 것이다. 불교사상에서 보자면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아비달마의 시간론에서는 ‘삼세실유(三世實有)’를 강조한다. 삼세란 과거, 현재, 미래를 일컫는다. 여기서 세(世)는 순간에 해당하며, 과거, 현재, 미래가 집적된 시간인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는 행(行)을 의미한다. 아비달마 이론에 따르면 삼세의 순간은 생성되고 소멸할 뿐만 아니라 여러 대상들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실체가 없다. 존재의 유한함을 극복하는 길은 관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유한한 삶을 무한히 존속시키는 것이 바로 기억(記憶)이다.

그런가 하면 이 작품은 언어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소설 속에서 남녀 주인공인 한나와 미하엘의 대화가 온전하게 소통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초반에는 미하엘이 화자(話者)이고, 한나가 청자(聽者)이다. 이때 둘의 대화는 책을 읽고, 그것을 들음으로써 이뤄진다. 책 읽기가 끝나면 정사를 나눈다는 점에서 둘의 대화는 일종의 성행위의 선행 조건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제 갓 육체적 성애에 눈 뜬 미하엘이 조금이라도 더 한나와 침실에 같이 있고 싶어서 오랫동안 책을 읽는 장면에서는 그 혐의가 더욱 농후해진다. 미하엘에게는 발화(發話)와 발기(發起)의 욕구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행위에 책 읽기 행위가 개입되면서 둘의 관계가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옮겨진다는 사실이다. 둘은 성교육을 가르치고 배우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으나, 점차 연인의 관계로 발전해나간다.

중반에서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가 뒤바뀐다. 한나는 전범재판의 피고(被告)이고, 미하엘은 재판을 견학하는 법대 대학생이 된 것이다. 한나의 언어는 법정의 변호라는 규범적 커뮤니케이션에서만 가능한 언어이므로 사실상 ‘독백’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 보니 미하엘은 한나의 말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할 수는 없다.

소설의 말미에서도 둘의 대화는 끝내 단절된다. 미하엘이 한나에게 녹음테이프를 보낸다. 그것을 들으면서 한나는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 미하엘의 말〔言〕이 감옥의 장벽을 거쳐서 한나에게는 글〔文〕로 바뀌는 것이다. 만약 편지를 주고받았다면 둘의 대화가 완성될 테지만, 웬일인지 한나가 보낸 편지를 미하엘은 읽지 않는다.

이처럼 둘의 대화에는 항상 장애물이 있다. 초반에는 한나가 문맹인 것이, 중반에는 한나가 피고라는 것이, 말미에는 한나가 수인(囚人)이라는 것이 장벽 역할을 한다. ‘문맹-피고-수인’이라는 순차적이고 점층적인 한나의 신분변화에서 알 수 있듯, 한나에게는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일종의 원죄(혹은 업보)라고 할 수 있다.

서사만 보자면 《더 리더》는 미하엘과 한나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 작품이지만, 정작 그 서사 안에 용해돼 있는 것은 과거사의 문제이다. 소설 독일의 과거사 문제와 한국 사회의 과거사 문제가 근원적으로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라면, 마땅히 그 사회 구성원의 가슴에 맺힌 멍울을 풀어줘야 한다. ‘상생(相生)’의 선 과제는 ‘해원(解寃)’이다.

소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는 명료하다. 작가는 “법의 경계는 배제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포용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3조 승찬 스님과 4조 도신 스님이 주고받은 선문답을 떠올리게 된다.

도신 스님이 묻는다.
“해탈하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승찬 스님이 답한다.
“누가 너를 구속하는 이가 있더냐?”
“아무도 구속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구속하는 사람이 없다면, 너는 이미 해탈한 사람일진대 어찌하여 굳이 해탈을 찾느냐?”

승찬 스님과 도신 스님의 선문답에서 알 수 있듯 구속과 해탈의 경계는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이 작품 안에는 법철학적인 메타포와 언어철학적인 메타포가 함께 깃들어 있는데, 그 이유는 법조문도 문자의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법이야말로 대표적인 규정적 지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법이 함유하고 있는 언어는 규정함으로써 구속하는 언어가 아니라 경계를 허뭄으로써 포용하는 언어’라고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작품의 백미는 한나가 미하엘이 보내준 테이프를 들으면서 가슴 벅차하는 장면이다. 한나의 삶에서 가장 꽃 피는 시절은 미하엘과 보낸 나날일 것이다. 누군가 대신 읽어주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었던 한나. 한나에게는 사랑이 곧 대화였고, 대화가 곧 사랑이었던 것이다. 대화는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통로이다. 경계의 벽을 허물 때만이 사랑은 완성된다. 그 사랑은 이성애이기도 할 것이요, 인류애이기도 할 것이다.

유응오 | 소설가, 전 주간불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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