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불교는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불교의 모범으로 간주된다. 대만불교의 조직 운영방식과 잘 배양된 출가자 집단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으며, 대만 사회에서 대만불교의 영향력은 정부기관을 능가할 정도로 막강하다.

중국불교 또한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공산화 이후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놓였던 중국불교는 개혁개방 이후 다른 종교를 멀찌감치 제치고 빠르게 약진하고 있다.

대만불교와 중국불교가 이처럼 발전을 거듭하며 두 나라의 종교, 사회, 문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된 저력은 무엇에서 나온 것일까?

<불교평론> 2017년 봄호(통권 69호)에 게재된 전영숙 박사(연세대 중국연구원 전문연구원)의 ‘중국불교는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는 이런 의문에 해답을 제시한다.

전 박사는 “오늘날 대륙(중국)과 대만의 불교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불과 100여 년 전 중국불교는 거의 사라질 뻔했을 정도로 쇠락과 침체를 겪었다”고 밝힌 전 박사는 “뼈아픈 반성과 피땀 어린 노력으로 오늘날 중국불교는 전통시대 불교에 조금도 뒤지지 않을 만큼 큰 발전을 이루었다”고 강조했다.

전 박사는 오늘날 대만과 중국불교를 만든 원동력을 청말민국초(淸末民國初)에 일어난 거사불교운동에서 찾았다. “타락한 출가자에 대한 실망감에서 비롯된 거사불교운동이 출가자들에게 위기의식을 초래했고, 지속된 상호 간 도전과 응전 속에서 중국불교가 각성의 계기를 맞이했다”는 것이 전 박사의 분석이다.

전 박사에 따르면 “청말 중국불교는 방대한 공간과 재원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사회적 기여는 거의 없었고, 출가자 수준 또한 매우 실망스러운 상태였다”고 한다. 한 개 현(縣)에 사찰이 100~300여 곳에 이르렀지만 불교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출가자는 많지 않았으며, 출가자 상당수는 글자조차 읽을 줄 몰랐다는 것이다.

전 박사는 청말민국초 출가자 중심의 중국불교에 실망해 거사불교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로 ‘중국 불학의 중흥조’이자 ‘현대 중국불교 부흥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양문회(楊文會, 1837~1911)와 그의 제자 구양점(歐陽漸, 1890~1947)을 꼽았다.

전 박사에 따르면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 길을 잃고 방황하던 양문회는 《대승기신론》을 읽고 생애 전환의 계기를 발견”했다. 그는 불학을 제대로 공부해보고자 했지만 제대로 된 불경을 찾기 어려웠다. 불교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경을 다시 유포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중국에서 유실된 불학 선장본까지 판각·유포하는 등 피눈물 나는 노력을 쏟았다. 양문회는 자택을 희사해 경판을 새겼는데, 이곳이 유명한 금릉각경처(金陵刻經處)이다. 그는 또 1909년 금릉각경처에 기원정사를 설립해 출가자와 지식인, 재가자들에게 근대적 불교교육을 시작했다.

전 박사는 양문회의 이런 노력을 “기복이나 은둔의 상징으로 오인되던 불교가 긴 잠에서 깨어나 중국 사회에 새로운 길을 열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구양점은 양문회가 입적하자 그의 뒤를 이어 금릉각경처를 이끈 이다. 그는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 시대가 도래하자 몇몇 거사들과 함께 중국불교회(中國佛敎會)를 구상하고, 손문(孫文, 1866~1925) 총통에게 중국불교회를 이끌 대표자 명단과 회칙, 건의문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 

전 박사는 “중국불교회를 이끌 대표자들을 재가불자 지식인들로 구성했다”는 점에서 이 서한을 “향후 중국불교계는 거사집단이 이끌 것임을 사실상 선언하는 문서”라고 평가했다.

출가자들의 반대와 정국 혼란으로 중국불교회 창립 계획은 실패했지만 구양점은 현대적 불교교육과 불교연구를 진행할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을 설립해 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등 지식인 재가집단 위주의 불교운동을 하나하나 진행해 갔다.

구양순은 “대다수는 유랑하며 놀기나 좋아하는 자들로 새벽부터 밤까지 밥이나 받아먹는, 진실로 나라의 좀벌레”라고 할 정도로 출가자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전 박사에 따르면 출가자에 대한 혹독한 비판과 지식인 재가집단 위주의 불교운동은 “출가 집단에 엄청난 분노와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사가 양문회가 설립한 기원정사에서 구양점과 함께 수학한 태허(太虛, 1890~1947) 스님이다. 전 박사에 따르면 태허 스님은 “타락한 기성 불교집단보다 승단을 우습게 보는 엘리트 거사들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태허 스님은 양문회나 구양점의 현대적 불교교학 과정을 참고해 현대식 승려교육 체제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불교협진회를 조직하고, 금산사 총림을 현대식 승려불학기관으로 개혁하고자 했으나 보수파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태허 스님은 지식인 재가집단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쓰촨성 우한에 무창불학원(武昌佛學院), 충칭에 세계불학원 한장교리원(世界佛學苑 漢藏敎理院)을 세우고, 푸젠성 샤먼에 있는 민남불학원(閩南佛學院) 제2대 원장에 취임하는 등 현대적 승려교육에 힘썼다.

전 박사는 “태허 스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학교육기관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고, 단기간 운영에 그친 경우도 있었다”면서도 “(태허 스님의 노력으로 배출된) 이들 중 상당수가 중일전쟁과 대륙 내전 등 일련의 병란을 피해 홍콩과 대만으로 이주했고, 이들 덕분에 대만에서 대륙의 인간불교가 활짝 꽃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양문회와 구양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불교는 공산화 이후 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빠르게 약진하고 있는데, 전 박사는 그 이유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중국 최초의 재가자 수행단체 중 하나였던 상하이 정업사(淨業社) 출신 조박초(趙樸初, 1907~2000) 거사의 공로다. 그는 공산화 이후 불교사상이 공산주의사상에 결코 저촉되지 않는다거나 이웃 불교국가와 교류에 불교가 도움을 준다는 논리로 위기 때마다 공산주의 권력자들로부터 불교를 지켜냈다.

둘째는 중국불교계가 기본적으로 출가자와 재가자가 평등한 위치에 있으며, 승려교육에 경쟁시스템을 도입해 출가자의 능력을 객관화 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셋째는 개혁개방 이후 도시마다 거사림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 점이다. 이들 거사림 조직은 특정 사찰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전통사찰보다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사찰과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전 박사는 대만불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숨은 동력으로 “잘 수행된 훌륭한 출가자들”과 “청말민국초부터 대륙 공산화 직전까지 있었던 불교계의 대각성”을 꼽았다.

수행과 학식을 겸비한 대만의 대표적 고승으로 대만불교의 정신적 지주로 일컬어진 인순(印順, 1906~2005)과 법고산사 성엄(聖嚴, 1931~2009) 스님의 스승인 동초(東初, 1908~1977) 스님이 태허 스님의 제자였고, 불광산사를 이끄는 성운(星雲, 1927~) 스님의 스승 자항(慈航, 1893~1954) 스님은 금릉각경처가 있던 남경 출신으로 태허 스님과 함께 불교개혁 운동에 공헌한 이라는 것이다.

전 박사는 “대만과 대륙 불교계는 청말민국초 거사불교운동으로 시작된 불교계의 각성이라는 귀한 자산을 공유하고 있다”며, “난징(南京)에서 시작된 거사불교운동과 출가자의 각성은 오늘날 중국불교의 발전과 미래 중국불교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전 박사는 “중국불교의 미래는 밝다”고 강조했다.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중국의 불교 지도자라면 모두 가슴에 사람을 떠난 불교는 절대로 통하지 못한다는 철저한 각성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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