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 신성성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
경순왕, 왕건 아홉째 딸 맞고 선물로 진상
 

청태(淸泰) 4년 정유해 937년 5월에 정승(正丞) 김부(金傅)가 금을 새기고 옥을 두른 허리띠 한 벌을 바쳤다. 길이는 10뼘〔圍〕이고 과(銙 ; 장식으로 늘어뜨린 고리)는 62개이다. 이것이 진평왕의 천사대(天賜帶)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그것을 받아 내고(內庫)에 보관하였다.

청태는 중국 후당 폐제(廢帝)의 연호로 934~936년 즉, 3년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청태 4년은 실제로는 없었다. 그런데 청태 4년이라고 한 것은 그 다음 연호가 만들어질 때까지 통보가 오지 않아 고문서 등에서 그렇게 사용된 것이다. 역사서를 쓸 때는 춘추직필이기 때문에 그런 오자 역시 다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고치지 않고 그냥 옮긴다. 그런 의미로 《삼국유사》를 역사서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쳇말로 고치기 싫거나 고칠 줄 몰라서 그냥 썼을 수도 있기에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연호를 쓰던 시기로 지금 같은 서기 연도가 없었기에 과거에 대해서 그리 깊고 정확한 이해를 가지긴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중국역사가 아닌 우리 역사는 제왕과 일부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 제왕의 학문인 역사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역사 서술 방식인 춘추직필을 정말 알았을까?

천사옥대를 바친 김부는 신라 마지막 제56대 왕인 경순왕이다. 927년 포석정(鮑石亭)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신덕왕부터 경애왕까지 이어진 박씨 왕계가 다시 경순왕이 옹립됨으로써 김씨 왕계로 바뀐 것이다. 견휜이 무서웠던지 935년에 고려 태조에게 투항했다. 큰아들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을 반대했고, 막내아들 범공은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항복 후 왕건은 태자보다 위인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재혼시켰으며,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978년(경종 3) 4월에 승하하여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안치되었다.

935년 11월에 항복하고 낙랑공주와 결혼한 김부가 ‘천사옥대’를 가지고 있다가 937년 5월 즉, 19개월 만에 왕건에게 바친 이유는 무엇일까? 경순왕 김부는 처음부터 천사옥대를 왕건에게 줄 생각이 없거나 잘하면 줄 생각이었나 보다. 안주고 아들에게 주거나 잘하면 고마운 뜻으로 주려고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가 바뀌는 나말여초에 워낙 경황이 없던 터에 빼앗기지 않고 몰래 숨겨두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듯하다. 그리고 천사옥대를 바치기 직전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경순왕은 낙랑공주에 이어, 왕건과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홉째 딸도 아내로 맞이했다. 그리고 곧바로 천사옥대를 가져다 바쳤다. 아무래도 왕건의 결혼정책과 새 아내의 지극정성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이는 못 속이는 것인지, 여자를 밝히는 노욕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신라 3보 가운데 하나인 천사옥대는 그렇게 고려로 양도되었다.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는 진평대왕(眞平大王)으로 김씨이다. 대건(大建) 11년 579년 기해(己亥)해 8월에 왕위에 올랐다. 키가 11척이나 되었다. 왕이 즉위한 원년에 천사가 궁전의 정원에 내려와 “상제께서 나에게 이 옥대를 전해 주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 왕이 친히 꿇어앉아 그것을 받자 천사가 하늘로 올라갔다. 무릇 교묘(郊廟)와 대사(大祀)에는 항상 이것을 허리에 찼다.

도화랑에게 집사를 수여한 쪼잔한 진평대왕이 즉위하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다. 천사가 하는 모습을 보면 용이나 봉황이나 그런 신령스러운 짐승인 신수는 아니고 그냥 사람의 모습을 한 사신인 듯하다. 복잡이나 그런 것도 특별히 채록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냥 신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물론 기록하기 귀찮고 잘 모르고 요건만 전달하기 위해서 줄이고 생략해서 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신기했다면 ‘신이한 일’을 전하는 《삼국유사》에서 굳이 생략했을 가능성은 적다. 여하튼 천사가 내려와서 상제가 준 옥대를 전했다. 상제란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지위를 가진 천신(天神)인데 진평왕이 누구라고 친히 사신을 보내 옥대를 보냈을까?

백정왕이 너무 자잘한 인간이기에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천사옥대를 등장시킨 것은 아닐까? CG가 발달했던 시기가 아니니, 이 한 장면 연출하기 위해 안개도 피우고 향도 피우고 어둑어둑한 조명에 동아줄 등을 안보이게 하려고 예행 연습도 꽤 많이 했을 것이다. 어쩌면 도화랑에게 부탁해서 감쪽같이 한 번에 잘 끝냈을 수도 있다. 여하튼 대충 제대로는 했지만 그래도 엉성했을 것이니 신하들에게 입막음으로 술도 먹이고 선물도 주느라 돈도 꽤 많이 들었을 것이다. 자기만 옥대를 가질 수 없으니 중국이나 춘천에서 들여온 옥으로 짝퉁 ‘천사옥대’도 만들어 이날만큼은 쪼잔하게 굴지 않고 성골이나 진골 귀족들에게도 좀 나눠줬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서에도 밖으로도 진짜 천사가 내려와 옥대를 주고 간 것이 되었고 그때 참석한 사람들이 쓴 보안각서는 안 남았으니 다행일 따름이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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