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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과 분열을 즐기는 사회
2017년 03월 15일 (수) 08:25:45 박찬일 budjn2009@gmail.com
갈등과 분열의 인간, 갈등과 분열의 사회를 거부하고 조화·화해·균형·절제에 도달한 인간, 조화·화해에 도달한 사회를 보여준 것은 고전주의였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괴테)의 ‘아름다운 영혼’은 순수성, 독립성, 조화로운 감정의 구체화였다. 쉴러는 그의 ‘우아와 존엄에 관해서’에서 “아름다운 영혼 속에서는 관능과 이성, 의무와 기호(嗜好)들이 조화를 이룬다”면서 조화를 강조했다. 양식적(樣式的)으로 고전주의는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를 지향했다. 빙켈만이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자제력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리스의 조각 ‘라오콘’을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라고 명명했다.

합리주의, 효율주의, 최대 이윤의 법칙만을 지향하는 인간, 합리주의, 효율주의, 최대 이윤의 법칙만을 지향하는 사회를 거부하고, 환타지도 인간과 사회의 주요 항목 중의 하나라는 것을 보여준 것은 낭만주의였다. 낭만주의의 ‘그때 거기’(꿈-동경-무의식-광기)에 대한 관심은 ‘지금 여기’에 대한 반대였다. 낭만주의는 흥기하고 있던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간접적 비판이었다.

부르주아 사회의 위선과 오만, 부르주아 사회의 효율주의, 최대 이윤의 법칙들에 ‘직접적’ 메스를 들이댄 것은 발작으로 대변되는 프랑스의 비판적 사실주의였다.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차이는 ‘간접적 비판과 직접적 비판의 차이’였다.

다르게 말한다면 사실주의와 고전주의·낭만주의의 차이는 ‘제1의 세계’와 ‘제2의 세계’의 차이이다. 사실주의가 ‘제1의 세계’의 부정성(不正性)에 주목하고 그것을 ‘제1의 세계’로 그려냈다면, 낭만주의·고전주의는 ‘제1의 세계’의 부정성에 주목하였지만 그것을 ‘제2의 세계’로 그려냈다. ‘제2의 세계’로 그려냈다는 이유 때문에 고전주의·낭만주의는 나중에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는 말을 들었다.

1930년대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도 ‘현실로부터의 도피’와 관계있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아직 오지 않은, 부르주아 사회의 자유경쟁주의, 최대이윤의 법칙들이 극복된, 조화·화해의 세계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고전주의와 마찬가지로 조화·화해·균형·절제의 세계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공산 사회는 조화·화해의 세계였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제2의 세계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었다. 제2의 세계가 제1의 세계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었다. 중요한 것은 제2의 세계였다.

문제는 ‘조화·화해·균형·절제의 세계’이다. 갈등과 분열에서 벗어나 조화·화해·균형·절제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역사적으로 갈등과 분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어왔다는 사실이다. 18세기 말의 고전주의가 그랬고, 20세기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그랬다.

고전주의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모더니즘의 세목들이다. 크게 보아 모더니즘은 잃어버린 총체성이라는 전제 하에, 그 잃어버린 총체성을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총체성’은 다른 말로 하면 ‘조화·화해·균형·절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쉴러의 말을 ‘이용’하면 모더니즘은 관능과 이성의 조화, 의무와 기호의 조화에 도달하려는 노력이었다. 비록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을지라도.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엽의 ‘정신의 지형학’을 염두에 둘 때 후기모더니즘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후기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은 갈등과 분열을 즐기려고 한다. 갈등과 분열은 다양성의 다른 말이다.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셋보다는 넷이 좋다고 한다. 모더니즘이 둘의 분열, 셋의 분열, 넷의 분열을 두려워했다면, 후기모더니즘은 둘의 분열, 셋의 분열, 넷의 분열을 즐기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기모더니즘의 ‘구체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화·화해·균형·절제보다는 갈등과 분열에 전념하는 듯, 갈등과 분열을 즐기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갈등과 분열이 없으면 노무현 대통령도 없다.’ 갈등과 분열에 매진하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을 떠올려 보라, 무력한 노무현 대통령으로 비춰질 것이다. ‘후기모더니즘의 구체화’를 맛본 국민들은 이제 갈등과 분열이 없는 사회를 심심해한다. 앞으로도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대통령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바야흐로 갈등과 분열의 사회이다. 후기모더니즘이 구체화된 사회이다.

문제는 갈등과 분열을 즐기면서,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면서, 조화·화해를 지향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반대’에 대해서 못견뎌 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갈등과 분열을 즐기고 조장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갈등과 분열을 즐기고 조장하는 것’은 조화·화해를 지향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를 견디고, 반대를 즐기는 태도이다. 조화·화해를 지향하는 것은 모더니즘으로의 회귀이다.

-시인 · 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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