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교 있던 신원사 부근은 경주 오릉 서남쪽으로 비정
비형, 신라 첫 사찰 흥륜사 지은 뛰어난 건축가일 수도 

“신중사(神衆寺) 아니 신원사(神元寺)의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아 봐라.”고 하였다. 황천(荒川) 동쪽의 깊은 도랑이라고도 한다. 비형은 칙명을 받들고 그 무리들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런 까닭에 귀교(鬼橋)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신원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월남리에 있던 절이다. 경주 오릉(五陵)의 서남쪽을 신원평(神元坪)이라고 칭하므로 이곳을 신원사 터로 비정하기도 한다. 또한, 경주부 서쪽 십리에 있다고 하는 신원교(神元橋)가 귀교라는 견해도 있다. 한편, 황천은 경주의 남남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토함산(吐含山)에서 발원(發源)하여 남천(南川)으로 흘러들어가 다시 서천(西川)으로 합류하는 내천을 말한다. 그런데 그 황천 동쪽의 깊은 도랑은 어디일까? 얼마나 깊었기에 다리를 못 놓은 걸까?

비형의 초월적 능력으로 하룻밤 만에 완성한 귀교는 의식 속의 이승과 저승을 잇는 경계의 징표라는 견해도 있다. 죽은 진지왕의 혼령과 살아있는 어머니와의 결합, 즉 이승과 저승의 결합이라고 보고 비형은 다리와 같은 매개체로서 이승과 저승의 매개자가 되는 도깨비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도깨비는 대장일과 같이 두드리는 소리와 그 동사적 움직임을 명사화한 ‘두두리(豆豆里)’라고도 불리는데 초기 신라 설화에서 그 신성성을 부여받았던 야장신(冶匠神)이 진지왕대에 이르러 그 신성성을 잃어버리고 토목공사나 하게 되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의견인데, 그런 입장에서 보면 황천 역시 황천(黃泉), 즉 사람이 죽으면 가는 장소인 저승을 은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깊은 도랑 역시 이승과 저승 사이를 말한다. 결국 비형랑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존재가 된다. 용사가 50명이나 필요했던 이유도 사람이 죽은 후 이승에서 머무는 49일을 지난 다음날인 50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시 ‘도화녀비형랑’ 조는 당시의 언론탄압을 피해서 만들어낸 JTBC의 ‘뉴스룸’과 같은 존재였던 걸까?

왕이 또 “귀신의 무리 가운데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조정(朝廷)을 도울만한 자가 있느냐?” 묻자 (비형이)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국정을 도울만합니다.”라고 답했다. 왕이 “데리고 오도록 하여라.” 하였다. 이튿날 비형이 길달과 함께 (왕을) 알현하니 (길달에게) 집사라는 관직을 내렸는데, 과연 충직한 것이 비길 자가 없었다. 이때 각간 임종(角干 林宗)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이 명령하여 아들로 삼게 하였다. 임종이 길달에게 명하여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누문(樓門)을 세우게 하였더니, 길달은 밤마다 그 문루 위에 가서 잤으므로 그 문을 길달문(吉達門)이라 하였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을 갔으므로 비형이 귀신들로 하여금 그를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그 귀신의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두려워하며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성스런 임금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여기가 비형랑의 집이다. 날고 뛰는 잡귀의 무리들은 이곳에 머물지 말라.” 나라의 풍속에는 이 글을 붙여서 귀신을 물리친다.

여하튼 비형랑이 귀교를 만들어내자 진평왕은 몇 개 더 부탁하기로 했나보다. 그런데 흥륜사 남쪽 누문 길달문을 지어 각간 임종의 양아들이 되는 충직한 길달도 집사였다. 공사도 잘하는 모습이 비형랑과 동일하다. 결국 두 사람은 동일인이 아닐까? 개명을 하고 새롭게 살려고 했는데, 계속 절 공사나 시키니까 마음에 안 들어서 다시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닐까?

흥륜사는 신라의 불교 전래 및 공인 과정과 연관되어 가장 일찍 국가적 사찰로 창건되었다. 신라 왕경 내 칠처가람(七處伽藍)터 중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에 해당하는데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최초의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한 사찰이다.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와 함께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어 진흥왕 5년(544)에 완공되었다. 엄청나게 큰 절이니 만큼 남쪽 누문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토목공사가 이뤄졌을 것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다. 3일도 힘든데 이름까지 바꿔서 착하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일을 너무 많이 시키니 화가 났을 것이다.

어쩌면 귀신 이야기나 뭐나 다 거짓말일 수 있다. 미켈란젤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설계한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보다도 기술이 뛰어난 비형랑을 당시 사람들은 뭐라고 했을까? 귀신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어 진평왕대 최고의 건축가 비형랑을 귀신같은 사람으로, 진지왕의 아들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대흥륜사를 지키는 신중 같은 사람으로 말이다. 그래서 신원사를 착각해서 신중사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 여하튼 흥륜사의 남루 길달문이 남아있었다면 정말 대단한 세계 7대 불가사의가 하나 더 늘었을 것으로 보인다. 비형랑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나 하나 써야 할까 보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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