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에 큰 공 세운 노리부 상대등 임명 국정 맡겨
수와 외교 관계 수립…비형랑 진평왕 아들일 수도
 

여하튼 사촌인 비형랑에게 《삼국사기》 <직관지>에도 보이지 않는 하급 집사를 준 째째한 진평왕은 신라의 제26대 왕으로 579년부터 632년까지 재위한다. 작은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자 즉위하던 해(579) 8월에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해 일체의 국정을 맡겼다. 왕 자리를 노리던 진평왕에게 누리부가 꽤 공을 많이 세웠나 보다. 이후 580년(진평왕 2)에는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해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581년에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였으며, 583년에는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대감(大監)과 제감(弟監)을 각각 1인씩 두었다. 584년에는 국가의 공부(貢賦)를 관장하는 조부(調府)를 설치하고 조부령(調府令) 1인을 두었다. 같은 해에 또 거승(車乘)을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고 승부령 1인을 두었다. 586년에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고 예부령 2인을 두었다. 591년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

관제 정비는 잘했지만, 그래도 힘이 달렸는지 말기인 622년 2월 궁정관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內省私臣)을 설치하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金龍春)을 임명하였다. 진지왕의 아들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진지왕을 압박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나 보다.

여하튼 진평왕은 584년에 건복(建福)이라고 개원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중국 수나라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589년에 진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원광(圓光)이 600년에 귀국하였다. 이가 세속오계를 쓴 것은 유명하다.

602년에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 : 지금의 전라북도 운봉)으로 공격해왔고,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침입해왔다. 이에 진평왕은 608년에 원광(圓光)에게 <걸사표(乞師表)>를 짓게 하여, 611년에 이를 수나라에 보냈다. 그 결과 다음해에 수나라 양제(煬帝)가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이후 당대에도 조공외교를 지속하였다. 629년에는 대장군 김용춘과 김서현(金舒玄)·김유신(金庾信) 부자로 하여금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을 공격하게 하여 항복받기도 하였다. 재위 54년 만에 죽어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국서를 보내어 진평왕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였다.

비형랑한테는 좀 째째했지만, 같은 이복사촌인 용춘에게는 잘해서 그런지 진평은 대왕이 되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비형랑이 정말 진지왕의 아들인가? 데려와서 기른 거 보면 혹시 도화녀를 사랑한 것은 진평왕이 아닌가? 비형랑도 진평왕의 혼외자식인데 홍길동처럼 아바마마를 아비라고 부르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진지왕한테 덮어씌운 것은 아닐까? 추측은 자유니 한 번 생각은 해봤다. 어차피 사료가 없으니 뭐라고 굳이 논거로 제시할 자료도 없으니, 그냥 읽고 웃어 넘겨도 할 말은 없다.

(비형이) 매일 밤 멀리 나가서 놀자 왕이 용사 50명을 시켜 지키게 하였으나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경성(京城)의 서쪽에 있는 황천(荒川) 언덕 위에 가서 귀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놀았다. 용사들이 숲속에 매복하여 엿보니 귀신들은 여러 절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에 각각 흩어지고 비형랑도 역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용사들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왕이 비형을 불러 “네가 귀신을 거느리고 논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묻자 비형랑이 “그렇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진평왕이 비형랑한테 참으로 관심이 많았다. 작은 아버지 진지왕의 아들로 용춘과 용수도 있다. 그런데 유독 비형랑한테 흥미를 가진 것은 왜일까? 여하튼 비형랑은 진평왕의 호기심을 자극할 정도로 잘 놀았나보다. 문제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귀신들과 노는 게 문제였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더 관심이 많았나보다. 스토리텔링 상으로는 죽은 진지왕이 낳은 아이니까 귀신을 보고 함께 논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진지왕은 죽지 않았을 개연성이 크고, 비형랑은 진평왕의 아들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런 시점에서 귀신의 등장은 좀 황당무개하다. 마치 혼외자에 대한 소문에 물 타기 하듯이 뭔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여하튼 비형랑은 귀신을 잘 부리는 사람으로 왕의 관심까지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나 잽싸게 담을 넘었는지 50명의 용사가 쫓아서야 겨우 행적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행적이 묘연할 정도로 잘 돌아다녔다고 보면 된다.

왕이 “그러면 네가 귀신의 무리를 이끌고 신중사(神衆寺) 아니 신원사(神元寺)의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아 봐라.”고 하였다. 황천(荒川) 동쪽의 깊은 도랑이라고도 한다. 비형은 칙명을 받들고 그 무리들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런 까닭에 귀교(鬼橋)라 한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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