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월당 봉률(抱月堂 奉律) 스님 추모재’가 직지사 경내 스님의 추모비 앞에서 봉행됐다. <사진=직지사>

김천 직지사(주지 웅산 스님)는 3·1절을 맞아 3월 1일 ‘포월당 봉률(抱月堂 奉律) 스님 추모재’를 경내 추모비 앞에서 봉행했다.

이날 행사에서 직지사 부주지 묘장 스님은 추모사를 통해 “봉률 스님께서 기미년 3월 1일에 해인사 주변을 물들였던 태극기가 이 나라의 집집마다 펄럭이고 있다”며 “우리말을 쓰지 못해 입과 귀가 막히고, 우리글을 쓰지 못해 손과 발이 묶여야 했던 동토의 일제 강점기에도 스님께서는 해방이라는 희망의 씨앗을 민족의 마음에 뿌리셨다”며 봉률 스님의 업적을 칭송했다.

묘장 스님은 이어 “조국광복에 그 누구보다도 앞장섰음에도 불구하고 질곡의 근대사를 살아야 했던 까닭에 스님은 억울하게 남로당원이라는 누명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열반하셨다”며 “그래서 나무마다 새순이 돋는 이 신록의 봄날이 못 견디게 고맙다”고 말했다.

묘장 스님은 “봉률 스님의 행장은 우리 후학에게 양이 끌고, 사슴이 끌고, 소가 끄는 수레와 같다”며 “사명 대사께서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분연히 일어서 나라와 민족을 구했던 것처럼 봉률 스님께서는 민족혼을 말살하는 일제 강점기에 조국 광복을 이끄셨다”고 덧붙였다.

직지사 병법 보천 스님의 집전으로 봉행된 이날 추모재는 삼귀의례, 직지사 교무 혜창 스님의 ‘포월당 봉률 스님 행장 소개’, 직지사 부주지 묘장 스님의 ‘추모사’, 추모 헌화, 반야심경 봉독 순으로 봉행됐다.

포월당 봉률스님은 1897년 6월 23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31-2번지에서 아버지 선산 김씨 병문과 어머니 김해 김씨 하림의 3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봉률 스님은 퇴운(退雲) 큰 스님을 은사로 축발(祝髮)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해인보통학교와 해인사지방학림에서 수학한 스님은 일본에서 불교대학을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해인사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서간도 만주신흥무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만주일대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1922년 전국 사찰을 무대로 광복군 자금 모금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돼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스님은 1927년부터 1948년까지 직지사 주지를 역임하면서 가람 불사와 대중 포교에 매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님은 광복 이후 남로당 당원으로 몰려 모진 고문 끝에 입적했다. 봉률 스님은 입적 47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2004년 스님을 대신해 유족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상했다. 스님의 영정은 대구 통천사에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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