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라오스에 다녀왔습니다. 여행 사진을 정리하다가 인상적인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날 오전에 찍은 라오스 법당 안 풍경입니다. 대웅전인 것 같은 건물에서 할머니 셋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오전이지만 새벽에 일어나는 스님들에겐 점심인 듯 했습니다. 그런데 분주한 할머니들 사이를 고양이 두 마리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지나다니고, 그 옆으로는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누워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었습니다.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는 법당이 식당으로 변한 것도 새로운데 법당에서 개와 고양이가 제 집인 양 편하게 지내는 것도 신선했습니다. 스님들의 식사를 정성껏 준비하는 신도들과 개와 고양이가 어우러진 모습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개는 법당 밖으로 나가 흙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다시 들어오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깨끗함도 더러움도 없었습니다. 성스러움과 천함도 없었고,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개니 고양이니 하는 차별상도,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는 분별심도,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구별도 없어 보였습니다.

라오스 절에서 봤던 이 평화로운 공존이 불교가 추구하는 세계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여기서 멀어졌습니다. 세상은 점점 나빠져 가고 있습니다. 끔찍한 사건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더 심각한 것은, 어떤 동기도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이 있고, 발생 건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보다 몇십 년 뒤진 라오스는 좀도둑 정도의 범죄나 일어나지 강력 범죄는 없다고 하고,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이해할 수 없는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도대체 지금은 왜 점점 질이 나쁜 범죄가 일어나고 있을까요? 물론 미국 같은 나라는 상황이 더 심각하고.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미국, 2007)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점점 나빠져 가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 제목은 약자에 대한 배려나 휴머니즘이 부재한 사회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만이 살아남으며 믿음이나 신뢰는 결코 발붙일 틈이 없고, 죽지 않으면 죽여야 하는 긴장감이 팽배한 지옥과 같은 사회입니다.

영화는 코맥 맥카시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했습니다. 늘 자신들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어온 코엔 형제가 이번에는 원작이 있는 영화를 찍었는데, 이 영화는 황량한 텍사스의 사막을 배경으로 지옥의 한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시대에 대한 통찰이 돋보였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엔 형제의 대표작 중 하나로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을 비롯해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였습니다.

영화에서 표현한 사회는 꽤나 암울했습니다. 사람도 아니고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닌 것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상이 이런 식으로 바뀐 이유는, 돈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사람들이 이 괴물에게 “이럴 필요 없잖아요. 이해할 수 없어요.”라는 말을 계속 하는데, 괴물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의 머릿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고, 어떤 논리의 지배를 받는지도 가늠할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200만 달러가 들어있는 돈가방이었습니다. 주인공 모스는 사냥을 갔다가 우연히 총격전이 일어난 현장에서 돈가방을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출혈이 낭자한 마약 거래 현장에서 모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습니다. 돈을 챙길 것인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 줄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서 모스는 돈을 선택했습니다. 이 선택은 너무나 잘못된 것이고, 이로 인해 그는 살인자에게 쫓기고, 결국은 자신을 비롯한 아내와 장모 등 전 가족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맞게 됐습니다. 모스의 비극은 결국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하는 경고였습니다.

모스가 우연히 맞닥뜨린 마약거래 현장에는 물을 요구하는 생존자가 있었습니다. 총을 맞아 출혈이 많았지만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에게 물을 한 모금 먹이고 병원으로 데려가 목숨을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목숨보다는 돈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어가는 남자를 버려둔 채 총기를 주섬주섬 챙기고 돈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잠자리에 누웠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물을 갖고 총 맞은 남자를 찾아갔지만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주인공 모스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누구나 이 지점에서 갈등은 할 것 같습니다. 게 중에는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돈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사람과 돈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사람 나고 돈 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을 중시하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점점 돈을 중시하는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도 물론 돈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결과가 바로 우리 미래인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포기하고 선택한 돈 가방은 재앙 덩어리였습니다. 가방에는 추적 장치가 있었고, 누군가 가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에 있어야 하는데 그는 이해를 넘어선 인물이었습니다. 겉모습은 분명 사람입니다. 이름도 있고, 말도 하고, 옷도 입고, 사람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내면은 사람의 특성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가방을 찾으러 오는 남자, 이 남자의 존재감은 엄청났습니다. 이 영화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너무나 단순하고, 주제는 앞에서 말했듯이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입니다. 이 밖을 채우고 있는 것이 이 괴물이 갖고 있는 존재감이자 공포감입니다.

희대의 살인마 안톤 쉬거 역을 맡은 배우는 스페인 국민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입니다. 2대 8 가르마의 단정한 단발머리와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캐릭터를 만들어냈습니다. 강렬한 무표정, 저음의 특이한 목소리로 상대를 압도하고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입니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마찬가지로 영화사에 남을만한 악마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데, 안톤 쉬거는 자본주의 부작용으로 생겨난 괴물에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죽일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인 후 안톤 쉬거는 돈 가방을 챙겨 차를 타고 떠납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사고로 그는 팔이 부러졌습니다. 그때 그는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셔츠를 좀 벗어 달라고 했습니다. 부러진 팔을 걸기 위해서. 아이들은 사고로 팔이 부러지고 뼈가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에게 셔츠를 벗어줄 만큼의 따뜻함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돈을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안톤 쉬거는 셔츠 값이라면서 기어이 아이 손에 돈을 주고 사라졌습니다. 안톤 쉬거가 떠난 후 아이들은 서로 더 차지하려고 돈을 두고 다퉜습니다.

처음에 자비심과 선량함을 갖고 있던 아이들이 돈이 생기자 다툼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안톤 쉬거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내고 세상을 점점 험악하게 만드는 것은 돈이었습니다. 돈으로 집약되는, 자본주의의 폐해는 최근 영화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입니다.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비롯해 다르덴 형제 감독의 <내일을 위한 시간> 등 유명한 감독들이 주로 이 문제를 다뤘는데, 물질이 인간을 우선하는 사회에서도 앞의 두 감독이 희망을 보여주었다면 코엔형제는 절망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타락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처럼 세상은 점점 사악해져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방법은 없을까요? 세상이 좀 더 따뜻해지고 사람들이 선량해질 방법은? 《원각경》에서는 ‘한 세계가 청정하므로 여러 세계가 청정하고, 여러 세계가 청정하므로 마침내는 허공을 다하고 삼세를 두루 싸서 모든 것이 평등하고 청정해서 움직이지 않느니라.’고 했습니다. 이해한 바로는, 내가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면 세상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구하라고. 불교는 언제나 문제의 본질을 나에게서 찾았습니다. 시선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향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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