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佛性)에는 정인불성(正因佛性), 요인불성(了因佛性), 연인불성(緣因佛性)의 세 가지가 있다. 이 세 가지 불성은 일체 중생들이 모두 지니고 있는데 간략히 정리해보면, 정인불성은 일체의 번뇌를 여읜 진여실상으로서 곧 부처가 될 수 있는 본성을 말한다. 요인불성이란 진여의 이치를 비추어 보고 도달하여 깨닫는 지혜라 한다. 연인불성이란 지혜를 도와서 정인불성을 개발하는 일체 선근(善根) 공덕을 말한다.

이 세 가지 불성이 일체 중생들에게 갖추어져 있는 모습과 그 상호 작용을 《열반경》에서는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정인불성과 요인불성의 관계이다. 중생에게 불성이 있는 것은 우유 속에 타락[酪素]이 있는 것과 같다. 우유에 효소를 넣고 따뜻하게 발효시키면 타락이 만들어진다. 여기서 타락을 정인불성이라고 하면 효소와 따뜻한 온도를 가해주는 것을 연인불성이라고 한다. 거리에서 불쌍한 사람을 보고 자비심을 일으켜 보시를 한다든지, 무너져 있는 고탑을 수리한다든지, 부처님 상 앞을 지날 때 예로써 인사를 한 번 하고 지나가는 등의 선한 행위가 다 연인불성이 되니 이것이 정인불성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유에 효소를 넣지 않거나 따뜻하게 보온하지 않고서는 타락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런데 경에서는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선근공덕과 같은 제법은 모두 실체가 없어서 허공과 같이 여기라 했으니, 허공은 성품이 없으므로 연인불성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 대답은 간단하다. 만약 우유에서 타락이 나왔다면 우유 속에 반드시 타락의 성품이 있으니 타락의 성품이 있다면 효소와 따뜻한 온도가 아니고서 어떻게 타락이 나왔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인불성이 나오게 하는 연인(緣因)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둘째, 요인불성의 작용에 대해 밝힌다. 중생들은 누구나 잠재적으로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드러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성품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성질을 요인불성이라 한다.

경에서는 세 가지 예를 든다. 어둠 속에 물건이 있을 때 물건을 보려면 등불을 비추어야 하는 것과 같고, 진흙 속에 병이 빠졌을 때 사람과 물과 노끈, 작대기가 필요한 것과 같으며, 니구타 나무의 씨가 땅과 물과 거름이 필요한 것과 같다. 중생 속에 있는 정인불성도 요인불성을 지어야 볼 수 있고, 요인불성을 빌려야 비로소 보게 된다. 곧 우유 속에 있는 타락도 이와 같이 효모와 따뜻함이라는 요인불성을 빌어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드러내 아는 요인에는 둘이 있다. 하나는 자기 스스로 아는 것이고, 둘은 남을 아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작용으로 우유 속에 불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요인(了因)은 정해진 실체가 아니다. 만일 요인이 스스로 알고 남을 아는 것이라면, 자기의 몸과 남의 몸을 헤아려 아는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몸의 성품은 자신을 알고 남을 아는 상[了相], 이러한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아는 상이 없기 때문에 지혜의 성품을 의지해야만 한다. 곧 요인은 본래 스스로 알지도, 남을 알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불성 있는 사람이라면 한량없는 선근공덕을 닦아야 한다. 선근공덕을 닦아야 계율과 선정, 지혜가 증장되고 정인이 드러나게 된다. 만약 인(因) 가운데 결정적인 과(果)가 있다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가 증장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본래 이러한 계율과 선정과 지혜가 없다가 스승으로부터 받고서 점점 증장하여 정인불성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 요인불성은 세 가지로 알 수 있다. 첫째는 점차적으로[轉] 드러난다는 것이다. 먼저 중생들은 금계(禁戒)를 지녀서 후회하지 않게 하고, 선정과 지혜를 닦아 나아가면 대열반을 얻게 되니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된다. 둘째는 묵연히[默]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잠자코 선근공덕을 닦아 나아가면 묵연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셋째는 반문하여[疑] 아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인(了因)이 둘이 있다면 우유 속에 어째서 두 가지가 있지 않은가 하는 등이다. 우유가 있으면 타락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중생이 있으면 불성이 있다고 한다.

다섯째, 불성이 삼세에 걸쳐 있는가, 없는가를 밝힌다. 불성은 과거에는 없고 미래에는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 아들이 없으면 아들이 없다고 말하듯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없는 것을 어떻게 있다고 말하느냐는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과거에도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가령 귤의 씨를 심어서 싹이 나고 씨가 없어졌으나, 과일이 맺혀 익으면 그 맛이 달다가 철이 지나면 시게 된다. 씨나 싹이나 풋과일이나 익은 과일이나 철 지난 과일에게 본래는 모두 없던 단맛이고 신맛이다. 그런데 시절과 여러 가지 인연으로 있는 것이다. 이 과일은 비록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지만 생겨난 것이요, 이것은 근본을 원인으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본래의 씨가 비록 지나갔으나 있었다고 하듯이, 과거에도 불성이 있다고 한다. 미래에 불성이 있느냐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옹기장수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옹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옹기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옹기가 없었다. 하지만 옹기장수가 허망한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옹기장수는 옹기 대신 옹기를 만들 수 있는 진흙과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미래의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Ikiw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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