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companion animal)’을 기르는 인구가 천만을 넘었다고 한다. 국민 다섯 명당 한 명이 개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덩달아 연관 산업도 커져 조만간 3조원이 넘는 시장으로 급팽창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반려동물이란 말은 1983년 10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인간과 애완동물의 관계(the human-pet relationship)를 주제로 하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처음으로 제안되었다고 한다. 평생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고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K. 로렌츠가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제안한 말이라고 한다.

반려동물 중에는 역시 개가 인간과 가장 가깝다. 나도 풍산개를 키워보았는데,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그리움이 결코 사람보다 덜 하지 않다. 아래의 글은 한 백구(白狗)이야기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 선생의 《동주집(東州集)》에 실려 있는 글이다. 이 글을 번역할 때는 신기하기도 하고, 과연 그런 일도 있을까 싶었지만, 그 이상의 특별한 느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떠오른다. 널리 알리라는 부처님 뜻인가 하여 다시 다듬어서 소개한다.

백거사기(白居士記)

백거사는 개이다. 털이 희고 부드러우며 선행(禪行)이 있어서 이렇게 부른다. 명산대찰을 찾아 즐겨 유람하며 곳곳에 족적을 남겼다. 나는 관서 지방에 있을 때 이 ‘산을 유람하는 개[유산견(游山犬)]’에 대해서 들었다.

백거사는 처음 영변의 묘향산에서 시작하여 구월산과 신숭산을 거쳐 동쪽으로 금강산, 한계령, 오대산 등 영동과 영서의 여러 산을 유람하고는 다시 북으로 칠보산에 갔다가 남으로 삼각산에 올랐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에 부처님 계시고 스님 모인 곳이라면 두루두루 분주히 찾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갑자년(1624, 인조2) 여름에 백거사는 충청도의 속리산에서 합천 가야산에 와 있었다. 때마침 나도 관찰사로 가야산 해인사에 잠시 머물러 있었다. 내가 절의 스님에게 백거사와 함께 오게 하였는데, 개라고 부르면 고개를 숙인 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반드시 거사라고 불러주어야 뛰어 왔다. 고기를 주면 먹지 않고, 오직 채소만 먹었다. 언제나 낭무(廊廡)의 섬돌 위에서 자고 일어나면서, 개들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도 않았다. 꼬리를 흔들며 먹을 것을 구걸하지도 않았고, 울타리 밑에서 싸우는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백거사가 암컷과 교미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참으로 믿기 어렵다.

백거사가 들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작은 패에 산 이름을 새겨 주었다. 내가 직접 그 목에 걸린 여덟 개의 대쪽 패를 보았는데, 모두 나라 안의 명승지로 세상에서 이른바 신선들이 머문다고 하는 곳이다. 그 지나온 길을 헤아려 보니, 산이 낮고 절이 비루하면 곧 힐끗 보고 떠나서 패에 새길 일도 없었던 것 같다.

백거사의 발을 보면 굳은살이 박이고 털이 없어 걷거나 뛰는 데에 쉬 지치지 않게 생겼다. 산에서 조금 특별한 경치라도 만나면 반드시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마치 감상이 뭔지 아는 자 같고, 또한 오래 머물기를 좋아하지 않아 가고 머무름에 연연해하지도 않는 것 같다. 다른 산으로 갈 때에는 반드시 승려를 따라가는데,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 산사에 출입하는 자가 아무리 많아도 아무나 구차히 따라가지 않는다. 그 신묘한 지혜와 말없는 깨달음은 생각하고 이야기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아! 세상 사람들은 작은 우물만한 곳에 발을 담그고, 저잣거리에 파묻혀서, 달팽이 껍질 속처럼 좁아터진 곳에서 살다가 죽는다. 그러면서도 “이만 하면 되었다. 어찌 꼭 눈으로 봐야만 하겠는가.”라고 하니, 얘기꺼리가 안 된다. 숨어사는 은사나 풍류를 아는 선비들이 산이나 계곡이 좋아 홀로 명승지를 찾는 것을 우아한 취미로 여기지만, 거의 세상일과 근심걱정으로 그 흥취와 연모하는 바를 잃어버리고 만다. 겨우 한 번 험한 산에 오른 걸로 자못 뻐기며 어지간히 자랑하다가 잠깐 사이에 늙어버리면, 지난날 구름과 노을 속의 선경(仙境)은 문득 꿈속 풍경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에 집 벽에 태산(太山)이며 화산(華山)을 한 치로, 천하는 한 자로 그려 놓고는 스스로 누워 감상하는데, 이 또한 사람들은 고상하다고 일컫는다. 그러니 거사가 노닐던 것과 비교해보면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다만 거사는 개의 몸에 얽매어서 그가 본 기이한 것들을 나열하며 천하에 드날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그러나 그대는 물고기가 아니니,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겠는가. 부처님의 오랜 업과 남은 인연은 알 수 없는 것. 거사가 찬 패에는 지리산과 월출산 등 호남의 여러 산 이름이 없다. 가야산 스님이 말하기를 하안거가 끝나면 거사가 어디론가 갈 것이라고 한다. 나도 짐짓 놀기 권태로워 가을 산에 낙엽이 지고 계곡의 돌 마르기를 기다려, 짚신 삼고 지팡이 짚고 반야봉 높은 정상에 올라, 거문고 뜯고 퉁소 불며 모든 봉우리에 다 울리게 할까 하는데......백거사가 따라오려나.

이 글을 쓴 동주 이민구(1589〜1670) 선생은 선조 때에 태어나 광해군과 인조 연간에 주로 활동하셨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쓰신 지봉 이수광(李睟光)이다. 지봉 선생의 좋은 두뇌와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력은 동주 선생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세 번의 장원급제와 최연소 관찰사로 일찍부터 명성을 날렸다. 선생은 문장에도 능하여 평생의 저술이 4000여권을 헤아렸다. 애석하게도 전란 중에 대부분을 잃게 되지만, 그래도 현존하는 《동주집(東州集)》을 통해 보면 선생의 합리적인 사고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글은 선생이 35세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영남지방을 순행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 들렀을 때의 이야기이다. 타고난 합리적 성격 탓으로 허망한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 나이도 아닌 때에,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이다. 그러니 한 점 허망함은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불교에서는 중생들이 육도(六道)를 윤회한다고 한다. 철학자로서 윤회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이성의 담장에 가로막혀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심도 깊어진다. 하여튼 이 글이 자꾸 생각나서 그토록 좋아하는 영양탕 먹기가 많이 주저된다. 어찌 개뿐이겠는가. 이참에 채식주의를 선언해볼까.

-철학박사 ·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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