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위된 후 여인 도화녀와 사이에서 비형량 태어나
사량부는 친위 세력…폐위 계기 공동체 전체 몰락
 

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 어느 민가 여인의 얼굴과 자태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사람들이 도화랑(桃花娘)이라고 불렀다. 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그녀를 범하려 했다. 여인이 “여자가 지켜야 하는 일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은 만승(萬乘)의 위엄으로도 마침내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하자, 여인이 “차라리 거리에서 죽임을 당하더라도 어찌 다른 마음 가지기를 원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왕이 농담 삼아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하자, 여인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녀를 놓아 보내주었다.

진지왕은 참으로 착한 왕이다. 지금부터 1,500년 전에는 황제와 같은 왕이 살고 있었고 진지왕은 신라의 왕이었다. 그런 왕이 민가의 유부녀 하나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진지왕이 정절을 소중히 한 도화녀를 인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진지왕이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워서 폐위시켰다는 것은 이상해도 많이 이상하다. 단지 소문이 날 정도로 매우 아름다운 유부녀에 관심을 갖는 게 잘못이라서 폐위시켜 죽였다면 지구상에서 남자가 몇 명이나 살아남았을까? 물론 지금 이야기가 아니다. 1,500여 년 전 신라 때의 일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 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은 2년 후에 도화랑의 남편도 역시 죽었다. 십여 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홀연히 왕이 평시와 같이 나타나 여인의 방에 들어와 “네가 옛날에 허락한 것처럼, 지금 너의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라고 했다.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부모가 “임금의 교시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고 말해, 딸을 방에 들어가게 하였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늘 오색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후에 홀연히 종적이 사라졌다. 여인은 이로 인하여 임신하여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할 때 천지가 진동하며, 한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하였다.

왕위 폐위되고 죽은 게 맞나? 아닌 듯하다. 왕위에서 쫓아내면서 목숨만은 살려준 듯하다. 그래서 왕인 것은 맞지만 살아있는 왕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명예살인된 왕인 것이다. 여하튼 폐위 후 2년 만에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심심하던 진지왕 즉 전왕은 도화랑을 찾는다. 죽었다고 알려진 전왕이 살아서 찾아왔으니 도화녀는 무척이나 깜짝 놀랐을 것이다. 유령도 아닌데 생사람 하나 사회적으로 매장시켰으니 진지왕도 도화녀의 놀란 표정을 보고 무척 겸연쩍었을 듯싶다.

사주에서 신살의 하나인 도화는 일명 도화살이라고 한다. 복숭아꽃이란 뜻이지만 결국 탐스럽게 아름다운 여성을 뜻하는 말로 자주 사용된다. 한의학에서는 소변과 대변을 잘 나오게 하고 활혈(活血)하는 효능이 있는 약재라고도 한다. 여하튼 얼마나 예뻤길래 도화녀라는 별명을 얻었을까?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혐오적인 발언으로 흔히 하는 ‘색기가 자르르 흘러서 결국 남편을 잡아먹었나 보다’라는 추측이 가능한 기사다. 여하튼 결국 죽은 진지왕과 사량부(沙梁部) 민간 출신의 도화랑(桃花娘)과의 사이에서 비형랑이 태어났다.

그런데 도화녀를 이야기하면서 사량부라는 지역명까지 말한 것일까? 혹시 신라 육부 중 하나인 사량부가 진지왕의 친위세력이었던 것은 아닐까? 진지왕 폐위사건을 계기로 공동체 전체를 도매금으로 ‘음란’한 ‘도화’살이 있는 곳으로 비하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역사는 참으로 숨기는 것도 많다. 속 시원하게 다 써놓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헌법재판소 재판 과정을 보면 그때만 탓할 게 아닌 듯하다. 뭐가 그리 숨길 게 많은지 지금이나 1,500년 전이나 ‘모르쇠’가 참으로 많았던 시절이다. 아재개그로 ‘모르쇠’를 제일 잘해서 진지왕은 쇠륜왕이라고 불린 것인가? 진지왕은 정말 뭘 몰랐던 것일까?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비형을) 궁중으로 데려다 길렀다. 나이가 15세가 되자 집사(執事)라는 직책을 주었다.

579년부터 632년까지 재위한 진평왕은 성이 김씨(金氏)로 이름은 백정(白淨)이다.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이다. 왕비는 김 씨로서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참으로 빵빵한 가문인데 진흥왕이 죽고 진지왕이 즉위할 때는 잠자코 찌그러져 있어야 했다. 자존심이 상해도 참 많이 상했는데, 절치부심 4년만에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오월동주 4년만이라도 성공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그런데 목숨만 살려달라고 해서 봐준 진지왕이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가보니 진짜다. 볼모로 삼을 겸해서 데려왔는데 안 죽고 15세가 되어 부득이 집사라는 직책을 주었다. 집사는 사량부에 거주하는 석장(石匠)들을 지휘 감독해 공사를 진행하는 직책이다. 그래도 사촌형제인데 참으로 째째하다. 그런데도 진평왕도 아니고 진평대왕이라고 한다. 왜지?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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