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부 지원으로 왕위 찬탈 가능성…4년 만에 폐위
사륜왕의 ‘사’는 ‘쇠’…요절 태자 금륜의 ‘금’도 ‘쇠’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이다.

이 기사를 보면 금륜왕 아니 사륜왕이 생시에 불렸던 진지왕의 이름 같다. 사전적으로 ‘사(舍)’는 그 음이 ‘샤’이며 ‘금(金)’의 뜻 ‘쇠’와 서로 통용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금륜’을 ‘사륜’이라고 했을까? 진흥왕의 아들 가운데 태자의 이름이 동륜이었다고 한다. 근데 일찍 가버렸다. 독살이었는지 아니면 너무 마구 놀다가 마약에 빠진 것인지 잘 모르겠다. 왕실이라는 게 지금의 대통령제가 아니라 황제와 같은 급이기에 항상 흥청망청했을 가능성이 크다. 여하튼 첫째가 가버렸으니 둘째가 왕위에 올랐다.

언뜻 이해하기에는 금륜, 은륜, 동륜을 생각하고 ‘왜 금륜이 둘째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금륜’은 ‘사륜’, 즉 ‘쇠륜’으로서 ‘쇠’ 즉, 금속을 일컬을 때 ‘금’ 자이다. 그러니 당시에 무척 비싸고 귀했던 동(銅)보다 못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동티가 나서 그런 것인지 여하튼 동륜이 가고 금륜의 시대가 열였다.
금륜왕의 재위 시기는 576∼579년 사이이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박 씨(朴氏)로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라고도 했다. 진흥왕에 이어 즉위해 이른바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시조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진흥왕의 적손(嫡孫), 즉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白淨 : 뒤의 진평왕)이 태어나 있었기 때문에 장자상속제의 예외가 된다. 이때 신라사회가 가부장제였다고 믿고 싶은 학자들이 적지 않은 것 같은데, 글쎄 그건 아니올시다가 맞을 듯하다.

어머니 사도부인은 모량리(牟梁里) 각간(角干) 영실(英失)의 딸이다. 진흥왕도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僧服)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호(號)하다가 몸을 마쳤다. 사도부인도 이를 본받아 출가하여 법명을 묘법(妙法)이라 하고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614년(진평왕 36) 2월에 영흥사의 소불(塑佛 : 흙으로 만든 불상)이 스스로 무너지더니 얼마 뒤에 사도부인이 죽었다. 이에 나라사람들이 예의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여하튼 진평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으니, 큰아들의 아들인 손자인 진평보다는 작은 아들 쇠륜을 사랑한 어머니 박씨 사도부인의 판단과 왕비 지도부인측 세력의 지원이 컸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또한 당시 최대 권력자인 거칠부(居柒夫)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도 있다. 진지왕이 즉위하던 해(576년)에 거칠부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해 국정을 맡긴 것도 결국 왕위 계승 성공에 대한 논공행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킹메이커를 자처했던 거칠부가 없었다면 진지왕은 쉽게 왕위계승을 하지 못했을 듯하다.

성은 김 씨이며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에 왕위에 올랐다.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579)라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579년에 진지왕이 폐위됨으로써 지도부인(知道夫人)은 궁궐 밖으로 나와 살게 되었다. 지도부인의 아들 용춘은 훗날 진평왕(眞平王)의 딸인 천명공주(天明公主)와 혼인하여 602년(진평왕 24)에 아들 김춘추(金春秋)를 낳았다.

<낭혜화상비(朗慧和尙碑)>에 의하면, 용춘 때에 이르러 족강(族降)되었다고 한다. 진지왕 폐위 이후 지도부인의 소생은 성골(聖骨)에서 진골(眞骨)로 족강되었다. 왜 그럴까? 폐위일까? 폐위도 원인이겠지만, 진지왕이 해서는 안 될 무언가를 한 것은 아닐까? 근친혼이 성행하고 성 도덕이 거의 없던 것이나 다름없는 곳에서도 해서는 안 될 일은 있었을 것이다. 그게 뭔지 매우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물론 분명 신성성과 관련된 것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다. 용춘은 족강되어 왕이 되지 못했지만, 진덕여왕(眞德女王) 사후 성골(聖骨)이 소멸되자 김춘추가 왕위를 계승하여 신라 중대 무열왕계를 열었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577년(진지왕 2)에 이찬 세종(世宗)이 백제군을 일선군(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북쪽에서 격파하고,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축조했다. 내리서성으로 통하는 길은 2년 뒤에 백제가 웅현성과 송술성을 쌓아 막히고 말았다. 578년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진(陳) 나라에 사신을 파견했으나, 재위 4년 만에 아쉽게 폐위되어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광해군과 같이 정치를 못한 것도 아닌데, 너무 쉽게 끝나버렸다. 함정에 빠진 것인가? 진지왕을 곤경에 빠뜨리고 그의 후손들의 골품까지 강등시킨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척이나 궁금하다. 딸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던 진평왕이 만든 스토리일 수도 있지만, 그 스토리를 가능하게 했던 시스템은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당시 신라 왕실의 절대 규범의 속살이자 판도라의 상자였을 것이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