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방 사람들은 모두 이욕(利慾)이 서로 얽혔으며 심성이 포악하여 번뇌에서 깨어나지 못하므로 좋은 것을 보면 침을 흘리고 고운 여인을 보면 음심을 품으나 이루지 못하고 바둥거리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서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곧 먹고 색을 보아도 곧 취하므로 그 뒤는 꼭 여름날 소나기 오는 것과 같이 순간에 몰록 잊어버려 마음이 장편하도다.”

이렇게 말한 “일해대사(一海大師) 서장옥(徐璋玉)이 제자 황하일(黃河一)을 시켜 전봉준을 동학에 입도케 하였다”는 적바림이 있는 바, 남접 가림천 뒤 목대잡이로서 김개남(金開南) · 전봉준 무장봉기를 채잡았던 난사람이 서장옥인 것이다. 30년 참선수행을 가진 선승으로 불도를 버리고 그 가르침이 바히 다른 동학에 들어가는 귀동반정(歸東反正)하여 스승으로 받들던 해월과 쌍구슬을 이룰 만큼 뛰어난 바탕을 보인 끝에 남접이 일떠서게 하는 뒷전 목대잡이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내림줄기 좇는 선승들 삶 모습을 뛰어넘으니, 서장옥을 미륵사상 물려받는 미륵패로 보는 까닭이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우리 역사에는 두 개 불교가 있었으니, 체제불교와 미륵불교가 그것이다. 그때 권세자루 쥔 무리들 들러리 노릇이나 하여 제 한몸 배나 기름지게 하고 절집 겉모습에 번쩍이는 금칠이나 하여 인민대중들 등골 뽑아먹는 호권불교 곧 체제불교와, 더러운 이 땅을 뒤집어 이제 이곳을 그대로 깨끗한 땅으로 만들자는 미륵불교가 그것이다.

궁예(弓裔)부터 비롯하여 묘청(妙淸) 거쳐 신돈(辛旽)까지 이르렀던 미륵사상은 주자이데올로기로 안받침된 조선왕조가 세워지면서 땅속으로 스며들어 목숨줄을 이어가게 되니, 당취(黨聚)가 그것이다. 이제도 막되먹은 따디미(가승)를 가리켜 ‘땡초’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당취→당추→땡추→땡초로 그 부르는 소리가 바뀌게 된 것이다. 이제 바로 여기를 속속들이 꿈나라인 용화(龍華)세상으로 만들자는 것이 미륵사상인 바, 권세자루 쥔 무리들에 붙어 금부처나 만드는 체제불교와는 뒤쪽으로, 중생들이 사는 모둠살이 틀거리를 새롭게 바꾸어 짜자는 혁명승려 동아리가 바로 ‘당취’였던 것이다. 이른바 정통 불교사라는 데서 한눈길도 주지 않는 이가 일해선사 서장옥인 바, 일해선사가 미륵당취였던 까닭이다. 당취 저 혼자 힘만으로는 미륵세상을 만들어 낼 수 없으므로 그때 중생들한테 뜨거운 손뼉을 받고 있던 동학이라는 그늘대 속으로 들어가 그들 꿈을 이뤄내고자 하였고, 그런 무리들 대표가 일해미륵이었던 것이다.

서장옥은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삼전대사(三田大師)로 불리었다고 한다. 동학 별파인 신유갑파(申由甲派) 도꼭지였다고 한다. 신유갑(申由甲)이라는 이름자를 보면 밭 전(田)자 세 개로 이루어졌으므로 삼전대사로 불리었던 것이겠다. 이로움이 밭과 밭 사이에 있으니 벼 아래 그치라는 정감록 비결 ‘이재전전도하지(利在田田稻下止)’에서 따온 것인지, 밭 가는 농군들한테 논밭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 한울갈피 좇아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삼전대사 신유갑파라는 이름자가 가슴을 친다. 빈틈 없이 농군 편이었던 서장옥이었다. 지리산 당취였던 서장옥은 김개남 · 손화중(孫化中) 부대에서 당취들로 짜여진 별동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2·3차 의병전쟁에서 가장 뜨거웠던 것이 지리산싸움이었다. 갑오년에 살아남은 김개남 · 손화중부대 농군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갔고, 삼전대사가 거느리는 지리산 당취와 힘을 합뜨려 왜병과 싸웠던 것이다.

서장옥이 태어난 해는 1852년이다. 청주 사는 음선장(陰善長)이라는 농군이 사위 서장옥한테서 동학을 배웠다고 하니, 서장옥 33살 때였다. 처가를 이음줄로 북접과 이음고리를 맺으며 승속을 넘나들던 사위가 자리개미당한 두 달 뒤 장인 또한 잡혀 무기징역에 떨어지니, 서장옥 각시와 자식들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갑오봉기가 무너진 다음에도 6년을 더 살며 미륵당취 길을 걸었던 서장옥이었으니, 큰산(지리산 다른 이름)을 사북으로 하여 여기저기서 속달뱅이 맞싸움이 이어졌는데, 이러한 날치싸움 목대잡이가 일해미륵이었고, 일해미륵이 채잡는 미륵당취였다. 문학적 상상력 또는 역사적 상상력만으로 해보는 말이 아니다.

일해미륵 조쫍던 당취 뒷자손들은 왜제 때 큰산을 두리로 해서 항왜 빨치산싸움을 벌였으니, 구구빨치이다. 남조선단독정부가 세워지면서 들어간 이들은 구빨치가 되고, 6·25가 터지면서 들어간 이들은 신빨치가 되고, 스무살 및 소년소녀들은 애빨치가 되어 항미 빨치산싸움을 벌였으니, 모두가 헐수할수없게 된 농군들이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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