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 그것은 문자어언(文字語言)일 뿐 교의는 무엇인가?
진조: 말을 잃어버리고 구담(口談)하고자 한다. 생각을 없애고 심연(心緣 외경의 대상 사물을 인식하는 것)하고자 한다.
운문: 말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유언(有言)에 대한 것이다. 생각을 없앤 것은 망상에 대한 것이다라는 그 교의는 무엇인가?
진조: 무어(無語).
운문: 듣는 바에 의하면 상서는 법화경을 읽고 있다고 하는데 맞는가, 틀리는가?
진조: 그렇다.
운문: 경 가운데 말하기를 일체의 치생산업(治生産業) 모두 실상과 위배되지 않는다고 한다. 말하라. 비비상천(非非想天)에 몇 사람이 있다가 물러갔는가?
진조: 무어.
운문: 상서, 바쁠 것 없다. 역대 승가들은 3경5론을 버리고 총림에 들어가 10년, 20년 수행해도 아직도 스스로 아는 바 없다. 하물며 상서가 무엇을 알겠는가?

진조는 이 말에 운문에게 절하곤 잘못을 시인한 뒤 투구를 벗었다. 진조가 진실로 불도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의 일이다.
진조가 배휴 · 이고와 더불어 당나라에서 유명한 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인연에 의해서다.

진조구쌍안(陳操具雙眼) [진상서간자복 陳尙書看資福]

진조상서가 자복화상(資福和尙)을 만나러 갔다. 자복화상이 진조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손가락으로 공중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진조는 이 느닷없는 짓을 보고 “제가 지금 와서 채 앉기도 전에 동그라미를 그리다니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그런 동그라미를 보자고 온 게 아닙니다.”하고 따졌다. 자복화상은 방문을 탕하고 닫아 버렸다. (이 이야기에 대해 설두화상은 ‘진조는 과연 눈이 틔어있군’하고 평했다 한다.) 《벽암록》 제33

47. 삼성혜연(三聖慧然 臨濟宗)

진주 삼성원의 혜연선사(慧然禪師)는 임제의현(臨濟義玄)선사의 적사(嫡嗣)이다. 스님은 임제선사와 헤어진 다음 여러 곳의 총림을 편력하여 앙산혜적(仰山慧寂)선사에게 머물렀다. 앙산선사가 묻기를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라 하는가?”하니 혜연스님은 “혜적입니다.”하였다. 앙산이 말하길 “그것은 내 이름이네.”하므로 “저의 이름은 혜연입니다.”하니 앙산이 크게 웃었다.

▲ 삽화=강병호 화백

혜연이 또 향엄지한(香嚴智閑)선사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향엄선사가 물으시되 “어디서 왔는가?”하니 스님이 답하길 “임제선사 계신 데서 왔습니다.”하였다. 다시 향엄선사가 “임제의 할을 배워갖고 오라.”하므로 바로 방석으로 정면을 후려쳤다.
덕산선감(德山宣鑒)선사와의 법거량도 있다. 그가 덕산선사를 뵙고 좌구를 깔고 절하려고 하자 덕산선사가 이르시되 “부엌걸레(행주)를 펴지 말라.” 하니 혜연이 “만약 있다 해도 손도 대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그러자 덕산선사가 바로 후려쳤다. 그러자 혜연은 막대기를 쥐고 선상 위로 밀고 올라갔다. 덕산선사는 크게 웃으며 “창천(蒼天)이다”고 외쳤다.
혜연스님은 그 뒤 설봉의존(雪峯義存)선사에게 혹은 도오종지(道吾宗智)선사에게 하듯이 당시의 총림을 돌아다니며 이름있는 선사를 차례로 찾아 역방했다.
혜연스님이 삼성원에 주석하던 어느 날 상당해서 말했다.
“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간다. 나갈 때는 사람들을 위하지 않는다.”하곤 선상에서 내려왔다. 어느 때 한 스님이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혜연스님이 답하시되 “냄새나는 고기는 파리를 오게 한다.” 또 어느 때는 혜연스님이 한 수행승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수행승이 할을 하자 스님도 역시 할했다. 수행승이 또 할하자 스님이 또 다시 할했다. 수행승이 봉을 가리키며 무어라 말하자 스님은 봉을 잡고 후려치려 했다. 수행승도 역시 몸을 돌려 봉을 잡을 자세를 취했다. 스님이 말하되 “언덕을 내려오지 않으면 좋게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하곤 한 번 후려쳤다. 수행승은 “이 도적놈.”이라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스님은 임제선사의 활기용(活機用)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준엄한 솜씨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삼성투망금린(三聖透網金鱗) [삼성금린 三聖金鱗]

 
"금빛 물고기는 무엇을 먹나?"
 "자네가 그물을 벗어나면 알려주지"

삼성스님이 설봉화상에게 물었다. “그물을 벗어난 금빛 물고기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봉화상이 “자네가 그물을 벗어났을 때 말해주지.”라고 대답하자 삼성은 “천 오백명이나 되는 제자가 있다면서 남의 말뜻도 못 알아듣는 군요.”하고 쏘아 붙였다. 그러자 설봉화상은 “나는 절 일이 바쁘다네.”하고 대답했다. 《벽암록》 제49, 《종용록》 제33

48. 흥화존장(興化存獎 830~925 臨濟宗)

위부(魏府)의 흥화존장선사는 임제스님에 의해 확철대오의 심원을 열었다. 원적(圓寂 원래는 무지와 사견을 여의고 깨닫는다는 뜻이었으나 뒤에 고승의 죽음을 뜻하게 됨)한 후 삼성혜연 밑에 있으면서 수좌가 되어 흥화사에 살았다. 이곳에서 임제선사의 종풍을 드날리는데 힘썼다. 그가 입적한 후 광제선사란 시호가 내려졌다. 법사(法嗣)로는 장휘(藏暉)와 행간(行簡) 등이 있다. 저서에 《흥화선사어록(興化禪師語錄)》이 있다.

광제복두(光帝幞頭)

광제가 흥화존장에게 이르길 “과인이 중원의 일보(一寶 보배를 일심의 영성에 비유함)를 얻었다. 그러나 그 값을 치를 수가 없다.”하였다. 흥화스님이 말하길 “폐하의 보배를 빌려 보고자 합니다.” 그러자 광제는 양손으로 복두각(幞頭脚 주나라 무제가 만들었다는 일종의 두건)을 끌렀다. 흥화스님은 “군주의 보배를 누가 감히 값을 치르겠습니까?”하였다. 《종용록》 제97

-선학원 총무이사 · 아산 보문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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