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 공인 인재등용, 국사 편찬, 팔관회 첫 개최
법흥왕 왕위 버리고 출가…법호 ‘법공’ 혹은 ‘법운’
 

전편에서 잊고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 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고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게 하였으며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한 왕이 바로 진흥왕이다.

결국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진흥왕의 즉위에는 이사부가 간여했고 지소부인의 세력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사부와 지소부인은 어떤 사이였을까? 그건 자료가 없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사부가 진흥왕의 대부와 같은 존재였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여불위의 사생아였던 진시황이 그랬듯이, 비슷한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진흥왕 역시 즉위 후 12년이 지난 551년에 개국(開國)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친정(親政)을 시작한다. 아무래도 7세가 맞나 보다. 그러니 19세 지금의 미성년이 끝나는 해가 되자마자 왕 노릇을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이것저것 많이 한 것 보면 축하해야 할 일 같기도 하다.

지소부인에 대한 사료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그녀의 행적이 자세하다. 지소부인은 법흥왕과 보도부인의 딸로 어머니 보도부인은 비처왕과 선혜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입종과 혼인하여 진흥을 낳고 태종과 관계를 가져 숙명과 세종을 낳았다. 그리고 침신 구진과 관계를 가져 딸 보명을 낳았다. 또 법흥의 유명으로 영실을 계부로 맞이하여 송화와 황화를 낳았다고 한다.

법흥왕이 옥진이 낳은 비대공 또는 영실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 했다. 지소부인은 대신들을 앞세워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진흥을 즉위시키고 자신은 섭정을 한다. 그녀가 섭정 이후 처음 실시한 것 중 하나가 종전에 있던 원화를 폐지하고 풍월주를 설치한 것이다. 준정이 영실에게 붙어 원화의 자리를 지속하고, 나아가 남모를 죽이자 지소는 지체 없이 원화를 폐지하고, 선화를 화랑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무리를 일러 풍월이라 하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하였다.

결국 필사본을 통해서 지소태후의 섭정과정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래도 필사본이라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필사본이 없어도 그 정도는 짐작 가능하니 어쩌면 위작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법흥왕은 왜 죽기 전에 왕위를 넘기려고 했을까? 나이 많은 비대공이나 영실공에게 왕위를 주고 뭘 하려고 했을까?

왕은 임종할 때에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운명했다.

위 사료를 보면 추측할 것도 없이 법흥왕은 왕위를 버리고 출가를 한 것 같다.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고민하던 중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국가적으로 공인했다. 이차돈에게 미안해서 그런 건지 법흥왕도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法空, 또는 法雲)이라 했다. 재위 27년 만에 죽자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에 장사 지냈다고 하니, 애공사의 공이 법흥왕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복도 많다. 생전에 왕도 해보고 삼보의 하나인 승보도 되고.

남조(南朝) 양(梁) 원제(元帝) 승성(承聖) 3년 즉 554년 9월 백제 병사가 진성(珎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 갔다.

진성은 전라북도 북부인 무주 지역에 해당되며, 조선시대의 진산군(珍山郡)으로 본래는 백제의 진동현(珍同縣)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백제가 침입한 건가?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했다. 진흥왕이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데 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고구려는 감동받아서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백제가 이것을 원망하여 침범을 한 것이다.

원조 경쟁이란 게 해봤자다. 결국 진성이 백제 땅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았고 이때 잠시 다시 노략질을 당했던 것으로 이해하면 별무리 없을 듯도 싶다. 하지만, 그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렇게 믿어달라고 하는 사료의 아우성일 따름이다. 거기에 답하면 메아리가 되는 것인가? 여하튼 진흥왕은 얼마안가 거칠부(居柒夫)를 비롯해 구진(仇珍)·비태(比台)·탐지(耽知)·비서(非西)·노부(奴夫)·서력부(西力夫)·비차부(比次夫)·미진부(未珍夫) 등 8명의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 지금의 철령) 이남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게 하였다. 결국 위의 말은 고구려 입장에서 보면 다 쇼였다. 진흥왕은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공유처럼 신들린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던 것은 틀림이 없는 듯하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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