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대로 이렇게 글을 쓰노라니 마음이 착잡해라
이 경계를 누구와 더불어 말할거나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은 것 마음과 말 밖이니
중생과 부처는 없고 산과 물은 있구나

因筆及此心緖亂 遮箇境界共誰伊
鵠白烏黑心言外 無生佛兮有山水

해설

이 시에는 사연이 있다. 경허 스님이 견성한 뒤 천장암에서 보임할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전등(傳燈) 법맥이 끊어진 뒤라 경허 스님은 선지식으로 이름난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허주(虛舟) 스님에게 이 시를 보내어 자신을 인가해줄 수 있는지를 시험했다. 당시 경허 스님은 분봉(分蜂)할 때 벌을 받는 짚벙거지 하나와 주장자 하나를 이 시와 함께 제자 혜월(慧月) 스님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허주 대사가 선지식으로 이름을 날리고 마곡사에 있으니 이것을 갖다 주게. 그리고 이것은 경허가 법물(法物)의 신표(信表)로 보내는 것이니, 그리 알고 받으라고 이르게. 하여간 나도 위에나 아래나 사법처(嗣法處)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즉 그렇게 하소.”

혜월 스님이 경허 스님의 분부대로 그 짚벙거지와 주장자와 시를 허주 스님에 전해 주었더니, 허주 스님이 크게 노하였다.

“미친 녀석 같으니라고 젊은 놈이 견성했다고 날뛰더니 또 이것을 법물이라고 이 늙은 사람에게 전하더란 말이냐. 이 허주는 그러한 것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고 경허에게 가서 이르게. 시큰둥하고 건방진 녀석 같으니라고. 요새 소위 참선을 좀 한다고 날뛰는 선객들은 이러기 일쑤란 말이야.”

이 말을 전해들은 경허 스님은 탄식하며 말하였다.

“허, 허주가 그래도 무던한 줄 알았더니 맹꽁무니였구나. 그만두어라. 그가 무얼 안다면 내가 그를 수법사(受法師)로 삼으려 하였더니, 함께 말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 그런즉 후일에 나의 제자들은 용암 장로(龍巖 長老)로써 나의 수법사를 삼아서 법맥을 따지게 하고 동학사 만화(萬化) 노장으로 나의 수업사(受業師)를 삼게 하라.”

허주 스님에게 크게 실망한 경허 스님은 <오도가(悟道歌)>에서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가 전해줄거나. 의발을 누가 전해줄거나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구나[四顧無人 衣鉢誰傳 衣鉢誰傳 四顧無人].”라고 크게 탄식했다고 한다. 김태흡의 <인간경허(人間鏡虛)>란 글에 나오는 얘기이다.

이 시를 다시 풀이해 보자.

나의 견성을 알아줄 사람이 없어 안목이 열린 선지식을 찾아 이렇게 시를 써서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 마음이 괴롭다.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은 것은 정식(情識)과 명상(名相) 밖이라, 깨닫고 보니 중생과 부처는 없고 산과 물은 있구나.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다는 것과 눈앞에 펼쳐진 산과 물은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차별이 없는 여여(如如)한 경계이다. 그러나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말은 생각이 만들어내는 상(相)일 뿐이다. 따라서 생각을 일으켜 취하고 버리지만 않으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그저 여여할 뿐이다. 부처를 좋아하고 중생을 싫어하여 부처를 취하고 중생을 버리는 것이 바로 중생 소견이요 병통이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니, 눈앞에 펼쳐진 산과 물을 버리고 따로 마음을 찾을 곳이 없다. 생각이란 미망의 그림자를 덧씌우지만 않으면 보고 듣는 것이 그대로 여여하니, 생각으로 취하고 버리는 것이 바로 상(相)이다. 그래서 《신심명(信心銘)》에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게 없으니, 오직 분별하여 취사(取捨)하는 게 문제이다. 단지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만 없으면 툭 틔어 명백하리라.”라 한 것이다.

《금강경》에 “무릇 상(相)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그것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 했는데, 이에 대한 《야보송(冶父頌)》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니, 부처가 어느 곳에 있는가[山是山, 水是水. 佛在甚麽處]?” 하였고, 함허(涵虛) 스님의 설의(說誼)에서는 “만약 줄곧 부처가 상 없는 것이라면 상 밖에 반드시 부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니, 부처가 어느 곳에 있는가[若一向佛身無相, 相外必有佛身. 卽今見山卽是山, 見水卽是水, 佛在甚麽處]?”라 하였다. 눈앞에 보이는 산과 물 밖에 따로 부처가 없다는 말이다.

《금강경》에서 상(相)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라 했다고 해서 상이 없는 것이 여래라고만 생각하면 상이 없는 것이 여래라는 또 하나의 상이 곧 생기고 만다. 생각이 곧 상이요 정식(情識)이다. 생각을 일으켜 취사하지만 않으면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여여한 참 부처의 세계 아님이 없고 나의 진여 공성(空性) 아님이 없으니, 산과 물, 흰 따오기와 검은 까마귀 뿐만 아니라 한갓 짚벙거지와 나무 막대기인들 예외일 수 없다. 짚벙거지와 주장자를 자기 깨달음을 증명하는 물건으로 보낸 것은 바로 이 소식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렇지만 경허 스님이 한참 어른인 허주 스님에게 자신이 직접 찾아뵙지 않고 제자를 시켜 짚벙거지와 주장자와 거침없이 휘갈겨 쓴 시 한 수를 보내 안목을 시험한 것은 견성한 지 오래지 않을 때 드러낸 실로 머터러운 소식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막 견성한 뒤에 스승인 만화 강백이 방에 들어와도 누운 채 일어나지 않기에 스승이 꾸짖으니, “어, 당신이 몰랐소? 요사장부(了事丈夫)는 본래 이러한 것이오. 태평무사(太平無事)에 할 일도 없는데 일어나 좌선하는 게 다 무엇이오. 무사한인(無事閑人)은 본래 이렇소.”라 한 경허 스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주자(朱子)는 “‘천지의 본성이 바로 나의 본성이니, 어찌 죽는다고 해서 대뜸 없어질 리 있겠는가’라고 한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이 천지를 위주로 한 것인가? 나를 위주로 한 것인가?”라 하였다.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생을 바라는 마음에서 우주의 본성과 자기의 본성이 같다고 한다. 그러나 우주가 스스로 자기 본성이 영원하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나의 본성이 우주의 본성과 하나여서 영원불멸하다 주장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근원에 합일하려고 하면서 실은 사사로운 나를 더욱 고집하는 것이다. 버려야 할 것을 오히려 더 꽉 움켜잡고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요, 동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다. 진정으로 우주의 근원에 합일하려면 나 자신을 찾아도 스스로 찾을 수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자신의 본성이 바로 부처라 영원불멸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망상이다. 이러한 생각을 일러 인적위자(認賊爲子), 즉 도적을 자식으로 잘못 안다고 하는 것이다. 유한한 중생을 버리고 생사가 없는 부처를 취하려는 생각이 바로 생사의 뿌리인 줄 모르는 것이다.
부처다 중생이다 할 때의 부처는 분별하는 생각이고 생각이 끊어진 곳이 바로 진짜 부처의 경계이다. 중생과 부처는 없고 산과 물은 있구나. 이보다 더 견성 경계를 직절하고 분명하게 보여준 법문은 찾기 어렵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ksce21@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