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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나, 다니엘 블레이크
비참한 구직자 삶 통해 인간의 존엄성 일깨워
2017년 02월 02일 (목) 10:06:29 김은주 cshchn2004@naver.com
   

2016년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영국, 2016)는 무척 좋은 영화입니다. 좋은 영화의 기준은, 영화를 보고 났을 때 마음에 어떤 에너지가 생겨났는가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노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게 공감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휴머니즘을 일깨워주는 영화였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의 거장 감독인 켄 로치의 영화입니다. 켄 로치는 ‘블루칼라의 시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영국 하층계급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또한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더할 수 없이 비참한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조차 잃게 만드는 가난과 정부의 관료적인 시스템, 이런 것들을 통해 약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공분을 일으키는 영화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여기서 그쳤다면 사회고발 다큐 정도에 그쳤을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최빈층에 해당하기 때문에 정말로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삶이지만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희생, 타인에 대한 연민 이런 것들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비록 사회적으로 패배자지만 그들은 매우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비록 식료품 보급소 앞에서 줄을 서서 배급을 기다리지만 그들 또한 자신의 역할에 책임을 다하고 자비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오프닝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검은 화면 아래서 목소리가 나오는데, 답답해하며 한숨을 자주 내쉬는 노인의 목소리와 기계음처럼 들리는 젊은 여자의 대화였습니다. 곧 그들의 정체가 드러났는데, 노인은 심장병이 악화돼 질병수당을 받으려는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사람이고, 여자는 다니엘의 건강상태를 점검하는 의료심사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의료심사관은 다니엘의 심장병과는 무관한 질문만 했습니다.

“혼자 50미터를 걸을 수 있으신가요?”
“전화기 버튼을 누를 수 있나요?”
“다른 사람과 대화가 가능한가요?”

심장병과는 어떠한 상관도 없어 보이는 질문에 다니엘은 분통을 터뜨렸고, 이게 심사관에게 나쁜 인상을 준 것인지 다니엘은 결국 질병수당을 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의사는 다니엘의 심장병이 심각한 수준이니까 당분간 일을 쉬면서 상황을 지켜보라고 했는데 정부의 복지 담당자는 그의 상태를 심각하게 보지 않은 것입니다. 심각하게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은 최대한 주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기계적으로 대하는 공무원들과의 갈등은 계속됐습니다. 질병수당 지급이 기각 됐기 때문에 다시 항소를 하거나 아니면 실직수당이라도 신청해야 하는데 그 절차는 의료 담당자와의 대화처럼 답답함을 느끼게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정부의 공무원들은 하나같이 감정이 없는 기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국민의 편의 보다는 행정 편리성만 추구했습니다. 컴퓨터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노인에게 온라인으로 실업수당 신청서를 제출하라고 하고, 또 인터뷰 시간에 조금 늦었다고 실업수당 대상자 명단에서 빼버리는 등 매뉴얼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상대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는 답답한 관료주의 행태를 보였습니다.

온라인으로 서류를 제출하기 위해 수십 번 시도했지만 컴퓨터의 장벽을 뚫을 수 없었던 다니엘은 결국 이웃에 사는 흑인 청년의 도움을 받아 서류를 제출하고, 생전 처음 이력서를 쓰고, 구직활동을 증명하기 위해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니고, 툴툴거리면서도 이런 저런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그는 아무런 수당도 받지 못했습니다. 식료품 지급이라도 신청하라는 어떤 여자의 말에 그는 “자존심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수당을 받기 위해 애쓰는 자신을 대하는 국가는 너무나 냉정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이 다니엘 자신을 초라한 인간으로 느껴지게 했습니다. 다니엘은 구걸하는 것처럼 자신을 느끼게 하는 국가복지 시스템에 분노했고, 그래서 더 이상 국가를 상대로 구걸하지 않겠다면서 관공서를 나왔습니다.

국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다니엘은 일하기 싫어서 꾀병 부리면서 수당이나 챙기는 그런 사람으로 비쳐졌습니다. 다니엘의 사회적 자아는 변변찮았습니다. 결코 존중받을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구직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작은 회사에 갔었는데, 그 회사 사장은 다니엘에게 ‘놀면서 먹으려는 나쁜 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의 사회적 자아는, 낡고 좁은 아파트에서 수당이나 받아서 살려고 하는, 게으르고 한심한 사람인 것입니다. 결코 존중받을만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은 정말 무가치한 사람일까요? 관공서에서 이곳 지리를 잘 몰라 좀 늦었다는 이유로 실업수당을 받지 못하게 된 케이티가 공무원에게 사정을 호소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소란이 있었는데 아무도 케이티 편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다니엘은 도저히 못 참겠다면서 나섰습니다. 케이티의 절박한 상황이 다니엘에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무관심한데 반해 다니엘은 상대의 고통에 반응하는 따뜻한 심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케이티의 집을 처음 방문한 날 다니엘은 전기가 끊겨 아이들이 추위에 방치된 걸 안타깝게 여겨 돈을 두고 왔습니다. 자신 또한 일도 못하고, 수당도 받지 못해서 집안의 물건들을 내다 팔아야 하는 처지였지만 다니엘은 자신보다 더 어려워 보이는 케이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다니엘은 계속해서 케이티에게 큰 힘이 됐습니다. 변기를 수리해주고, 아이들을 위해 나무 모빌을 만들어주고, 케이티가 일용직으로 일하러 간 사이 아이들을 돌봐주고, 그리고 학업을 계속 하고 싶다는 케이티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가 그녀의 희망을 지원한다는 의미에서 책장도 만들어주고, 늘 케이티를 도와주었습니다.

사실 케이티는 다니엘보다 훨씬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는데 대부분은 케이티와 관련한 장면이었습니다. 며칠 굶었다가 식료품 보급소에서 통조림을 받았을 때 극심한 허기로 자신도 모르게 통조림 뚜껑을 따서 허겁지겁 먹다가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하자 울음을 터뜨리며 “배가 고파서 그랬어요” 하는 장면은 정말 슬픈 장면이었습니다. 케이티의 전후 사정을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미친 여자쯤으로 오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내내 케이티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빠져있는가를 봐왔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의 존엄성까지 버리게 만드는 가난에 공감됐습니다. 밑창이 떨어진 운동화 때문에 학교 아이들이 놀린다는 딸의 말을 듣고 케이티는 나중에는 매춘을 하기에 이릅니다. 청소 일이라도 하려고 열심히 발로 뛰며 일자리를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케이티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일자리가 불법 매춘이라는 것은, 영국사회가 약자에게 얼마나 어려운 사회인가를 보여주는 설정이었습니다. 이런 케이티에게 유일하게 따뜻한 사람이 다니엘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흑인 소년의 위험한 택배를 기꺼이 받아주고, 또 정신병에 걸려 오랜 시간 앓은 부인을 죽을 때까지 정성껏 돌보며 책임을 다했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또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40년간 목수 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숭고한 사람입니다.

영화는 마지막에 다니엘의 편지를 통해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회적 자아와 다르게 다니엘은 숭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으로 그를 평가하고 대우했습니다. 영화는 다니엘이라는 사람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사회의 편협한 시선을 비판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성숙할수록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나고 있으며, 대표적인 것이, 인간 존엄성의 훼손입니다. 물질적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다 보니 여기서 밀려난 사람들은 존엄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된다는 것인데, 켄 로치 감독은 이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화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일념을 갖고 끈기 있게 사회적 약자를 대변해온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화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cshchn20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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