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천태종을 창시한 고려 중기의 불승,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은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을 부친으로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李氏)를 모친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왕후(王煦), 호는 우세(祐世), 법명은 의천(義天)이며, 경기도 개성 출신이다. 불교 전적을 정비하고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간행하였으며, 해동 천태종을 세워 교단의 통일과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스님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 11세(1065년, 문종 19)에 출가를 자원하였다. 화엄종 고승인 경덕 국사(景德 國師) 난원(爛圓)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지금은 북한에 있는 오관산 영통사(靈通寺)에서 경·율·논 삼장(三藏) 특히, 화엄(華嚴)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같은 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불교 교학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 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을 두루 섭렵하였다. 스승인 경덕 국사가 죽자 소년 법사로서 《화엄경(華嚴經)》과 그 소(疏)를 강설했다.

1067년(문종 21) 왕으로부터 ‘우세’라는 호와 함께 승통(僧統)의 직책을 받았다. 그러나 송나라에 유학을 계획하고, 송나라의 정원 법사(淨源 法師)와 편지를 통하여 교유하였다. 30세 때인 1085년(선종 2) 왕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송나라로 밀항, 변경(汴京)의 계성사(啓聖寺)에 머물면서 화엄의 대가인 유성 법사(有誠 法師)와 교유하였다.

그 뒤 상국사(相國寺)에서 운문종(雲門宗)의 종본(宗本)을 방문하였고, 흥국사(興國寺)에서 인도 승려 천길상(天吉祥)을 만나 인도의 사정과 학문을 배웠다. 또, 항주(杭州)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의 정원(1011~1088) 법사에게 가서 《화엄경》, 《능엄경》, 《원각경》, 《대승기신론》 등의 사상과 천태 지의와 현수 법장의 교학에 대하여 토론하였으며, 그가 고려에서 가지고 간 지엄(智儼)·현수(賢首)·청량(淸凉)·규봉(圭峯) 등의 저술을 통해, 천태종 승려인 자변 종간(慈辯 從諫, ?~1108)을 만나 천태교관을 전수받는 등 여러 종파의 학승들과 담론하였다. 스님은 종간으로부터 천태교학을 배운 뒤 중국의 천태종 개산조인 천태산 지의(智顗)의 탑(塔)을 참배하면서, 귀국하면 고려에 꼭 천태교학을 펼칠 것을 서원하였다.

스님은 14개월간의 구법활동을 통해 불교의 안목을 넓힌 뒤 불교 전적 3,000여 권을 가지고 1086년(선종 3) 귀국한다. 이후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송나라의 고승들과 서적·편지 등을 교환하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정원에게 《화엄경》과 장경각 건립비로 금 2,000냥을 보냈고,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에서 불교 서적 4,000여 권과 국내의 고서를 모았다.

스님은 귀국 후 3년 만에 국청사(國淸寺)를 짓기 시작, 1097년(숙종 2) 완공하고 그해 5월 국청사 제1대 주지가 되어 천태교관(天台敎觀)을 강의하였다. 이 때 1,000명이 넘는 학승(學僧)들이 모여들어 배움을 구하였다. 이때 지자대사 탑에 참배하여 법등을 전하기로 맹세한 서원을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태종을 새로 세웠다(1097년 숙종2). 2년 후인 1099년 첫 천태종 자체 승선(僧選)을 행하였고, 1101년 국가의 주관 아래 천태종의 대선(大選)인 천태선(天台選)이 시행됨에 따라 국가의 공인을 받은 한 종파로 성립되었다.

천태종은 원래 중국불교 13종 중 가장 대표적인 종파의 하나로, 수(隋)나라 천태대사 지의(智顗, 538∼597)가 《법화경(法華經)》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천태교학(天台敎學)을 완성함으로써 창종(創宗)되었다. 그는 천태종의 종조(宗祖)를 인도의 용수(龍樹)로 삼았고, 중국 제1조(祖)는 북제(北齊)의 혜문(慧文)을, 제2조는 그의 스승 혜사(慧思)로 삼았으며, 그 자신은 제3조가 되었다.

《법화경》은 인도에서 재가신도들이 중심이 된 대승불교운동의 태동과 그 맥락을 같이 해서 성립된 경이다. 따라서 이 경의 내용과 사상은 철두철미 대승불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경의 주 안목은 요약하면 ‘회삼귀일’과 ‘구원성불’의 두 가지이다.

첫째, ‘회삼귀일(會三歸一)’은 ‘회삼승 귀일승’, ‘개삼승 현일승’ 이라고도 한다.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한 초기에는, 대승과 소승이 대립하는 뜻에서 대승이었다. 초기의 대승이란 말은 가치적으로 소승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강했다. 그러므로 초기대승불교는 대‧소승 대립의 대승이다. 그런데 《법화경》은, 대승에서 다시 일승(一乘)을 주장한다. 일승이란 일불승을 뜻하는데 이 일승이 진실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문제를 조금 자세하게 보자. 삼승이란 성문, 연각, 보살승을 의미한다. 자세히 보면, 우선 성문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며 수행하는 사람으로, 구체적으로는 불제자들을 일컫는다. 성문이 이상으로 하는 것은, 사성제의 교설을 듣고 자기의 번뇌를 모두 단제해 버리고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자신만을 위하는 수행이 중요하지 타인을 구제한다는 조건은 없는 것이다. 연각은 다른 사람의 가르침은 받지 않고서 홀로 진리인 법을 체득한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대중을 외면하고 철학적 사색에 빠져 있는 이기적인 부파교단의 출가자들이다. 보살이란 원래는 서원에 의해 성불한 석가모니의 전생 명칭이다. 그 석가모니의 길을 본받아 자신의 성불을 자각하는 대승수행자들이다. 이 가르침을 보살승이라고 한다. 이들은 석가모니의 전세와 같은 보살행을 닦아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성불할 것을 이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문‧연각 등은 부처님의 본의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열등한 가르침에 천착하는 성문‧연각승을 소승(小乘)이라고 깎아내리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법화경》은 성문, 연각, 보살을 각각의 개성이나 근기에 따라 드러나는 성품으로 인식했다. 즉 자신의 성향과 근기에 따라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은 모두 일불승으로 들어오는 길이기 때문에 어느 길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치의 우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방편품>에서는 “여러 부처님이 증득(證得)하신 바, 법에는 무량한 방편력으로 중생을 위해 설한다.”라고 하고, “시방의 불국토(佛國土) 가운데, 오직 일승법(一乘法)만이 있을 뿐 삼승(三乘)도 삼래(三來)도 없다. 있다면 방편력(方便力)이 있을 뿐이다.”라고 한다.

일불승(一佛乘)이란 《법화경》의 가르침이 이승이나 삼승이 아닌 오직 성불의 한 가지 길만을 가르친다는 의미이다. 천태불교에서는 이것을 교일승(敎一乘)이라한다. 이 가르침은 여러 부처님[諸佛], 과거불, 미래불, 현재불, 석가불 등 오불(五佛) 모두가 일승(一乘)인 성불(成佛)의 같은 도를 가르친다고 천태불교에서는 말한다. 따라서 혹 다른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라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삼승(三乘)이란 방편이기 때문에 삼승(三乘)을 열어 진실의 일승(一乘)을 나타낸다는 것은 《법화경》의 일관된 사상이다. 경에는 “모든 부처님이 방편력으로 일불승(一佛乘)에서 삼승(三乘)을 분별(分別)하신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법화경》은 ‘회삼귀일’을 주장하여 기성 교단과 신흥 불교 운동의 대립과 갈등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어떠한 교리를 통해서든 열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중히 여기셨던 포용과 융합의 실천적 표현이라 본 것이다.

둘째, ‘구원성불’은 <여래수량품>에서 설하여진 것인데, 이 품에서 석존의 성불(成佛)은 금생(今生)의 일이 아니라, 실은 성불한지 무량무변백천만억나유타겁이나 된다고 하면서, ‘성불(成佛)의 구원(久遠)’을 설하고, 수명 또한 무량무변아승지겁이어서 상주불멸하며, 그 동안에 항상 영축산과 기타 도처에서 교화, 설법을 그치지 않았다고 하여 ‘불신(佛身)의 상주(常住)’를 설하고, 여기에서 훌륭한 의사의 비유를 들어 비록 멸하지 않으면서도 멸도를 보인 것은 중생을 구하기 위한 ‘대자비(大慈悲)의 방편(方便)’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성불은 동시에 부처님의 수명 무량, 불신의 상주, 교화의 무량, 자비의 무량, 그리고 구제의 무량 등을 복합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법화경》은 후반 14품을 본문이라 하고 그 본론에 해당하는 품을 <여래수량품>이라고 하였다. <여래수량품>은 구원의 석가모니부처님을 명확히 밝히는 경전으로 유명하다. 석가모니불은 영원한 과거에 성불하고 몇 번이나 이 세상에 출현하여 이 《법화경》을 말씀한다는 것이 이 품의 주제다. 그 성불의 시간은 오백천만억나유타아승지겁에 비유되는 무한한 과거인데, 시간적으로 무량함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래가 성불한 수명은 숫자로 비유할 때 무한, 즉 구원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법화경》을 설하시는 지금의 석가모니는 80년의 생애를 우리에게 보였지만 그것은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낸 것이며 실제로는 영원한 본불(本佛) 즉, 근원불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육신을 보인 것은 모든 중생에게 불지현을 열어 보이고 깨달아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경에서 말한다. 결국 이 세상에 육신을 나타내신 것이 방편이라면 적멸(寂滅)을 보인 것도 방편이라고 하겠다. 부처님이 영원이 이 세상에 머무르실 때 그 모습을 보고서 집착심 많은 범부중생들은 박덕한 생각으로 오욕에 탐착하고 정진할 뜻을 내지 않게 됨을 우려하여 스스로 부처님은 입멸을 선택하였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이 품에서 보이는 ‘의사 부자(父子)의 비유’는 이를 설명해 준다. ‘부처님 자아게’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보일지언정 실제로는 멸도 한 것이 아니며, 항상 머물러 이 법을 설하노라.” 그런데 중생이 전도된 생각 때문에 가까이 있는데도 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법화경》의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팔상(八相) 성도의 모습의 그 석가모니불을 통하여, 생멸을 넘어선 영원한 부처님, 다시 말하면 모든 부처님을 통합하는 원리로서의 근원불을 현출시킨 것이다.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010811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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