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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국가권력과 출가 승단의 관계 - 정교분리의 전개 ②
정교분리는 출·재가 긴밀하게 유지시키는 장치
2017년 02월 02일 (목) 09:32:40 조준호 yathabhuta@hanmail.net

계속해서 불교의 정교분리 입장을 좀 더 자세히 논의해 보려 한다. 불교교단의 정교분리적인 입장은 정확히 한정하여 말한다면 출가한 비구중의 범위에 해당된다. 이는 사부대중 가운데 재가중까지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출가 공동체에 한정한다 하더라도 2,60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 상황에서는 달리 적용될 수 있는 점도 논의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미얀마 불교의 경우 초기불교적인 전통이 강하지만 출가중이라 할지라도 전통적으로 정치 참여적인 입장은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하지만 초기불교의 율장과 경장에 나타난 정교분리적인 기본입장은 먼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불교에 시사하는 바를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왕권과의 관계에 있어 왕이 출가자의 특별한 위치를 인정하고 보호사는 사례는 경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초기경전인 《사문과경》에서 부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아자따삿뚜가 붓다를 찾아가 출가수행자가 현세에 얻을 수 있는 과보에 대해 묻는 질문에서 잘 나타난다. 붓다는 아자따삿뚜에게 출가사문의 현세의 과보로서 “왕의 종이라 할지라도 뒷날 수염과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집을 나와 도를 닦고 평등법을 실천하는 그를 본다면 그 때도 ‘저 사람은 내 종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명령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이에 왕은 그렇게 할 수 없고 오히려 “그가 오는 것을 본다면 저는 마땅히 일어나 맞이하고 앉기를 청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당시 출가자와 왕권 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왕의 종이나 하인 또는 왕의 녹을 먹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출가한 후 왕을 만나게 되면 왕이 오히려 예경하는 것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서로 간에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출가사문이 현세에 얻는 과보라고 한다. 하지만 거의 모든 율장에서 왕의 신하를 함부로 득도시키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 가운데 《마하승기율》의 예를 보면 한 비구가 은밀히 왕의 신하를 득도시켜 출가하게 하였다. 이에 다른 왕의 관리가 이 비구를 붙잡아 재판을 받게 하였고, 그 결과는 “화상을 잡아서 갈빗대 세 대를 부러뜨리고, 계사를 잡아서 혀를 뽑고, 10중(衆)을 불러내어 각각 여덟 번의 채찍을 가하고, 구족계를 받은 자는 극법(極法)으로 치죄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이 이를 알고 관련 비구들을 방면했다고 한다. 이후 빔비사라왕의 명에 의해 왕의 신하들이 허가 없이 출가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불교에 믿음이 없는 왕인 경우 이를 빌미로 교단에 위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왕의 신하나 관리 등에게 무단으로 구족계를 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계율 조항이 생겼다고 한다.

다음으로 세속의 범죄인이 도망하여 출가하면 국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처녀가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한 것은 사형에 처해지는 죄인데 어떤 릿차비(Licchavi) 처녀가 이 사실이 발각되어 잡혔으나 틈을 타서 도망하여 비구니정사로 들어가 출가하였다. 친족이 그 비구니를 찾아낸 뒤 왕에게 처벌할 것을 간청하였지만, 왕은 이미 출가해 버렸기 때문에 죽일 죄라 할지라도 세간의 법률로 세속 시절의 죄를 추궁할 수 없다고 답변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비구니율의 승잔법 가운데 ‘도적여계(度賊女戒)’, 즉 범죄를 저지른 여자를 허가 없이 출가시켜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제정되었다. 이로 보면 출세간은 치외법권 지역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더 극단적인 예는 앙굴리말라의 경우이다. 앙굴리말라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다가 붓다에게 교화되어 출가하였다. 그를 처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온 꼬살라의 빠세나디왕은 이미 출가해 있는 그를 붙잡아 세속법으로 적용시키지 못하고 되돌아갈 정도였다.

이처럼 불교교단이 왕권의 치외법권 지역임을 보여주고 왕이 독자적인 교권을 인정한 사례는 초기경전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율장의 조문 속에 그와 같은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사문석자 가운데로 출가하면 어떠한 제재도 가해서는 안 된다.”거나 또는 “만약 노비의 주인이 놓아주지 않았는데도 사문석자 가운데 출가하면 그 노비를 출가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문석자가 난행(難行)을 하고 고행(苦行)을 하며, 세속의 일을 버리고 열반으로 향하여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라는 왕명이 그것이다. 이렇게 왕들에 의해 불교교단이 보호받자 노비 외에 부채인과 도둑도 불교교단으로 도피성 출가를 하는 사례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도둑이 탈옥하여 출가하더라도 다시 잡혀가는 일이 없었고, 부채인이나 노비 또한 그러하여 손해를 입는 일들이 발생했다. 때문에 구족계를 줄 경우에 무조건 주어서는 안 되는 율 조항이 제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즉 율장에 보면 세간의 법률을 어기고 도피한 사람들도 구족계를 받을 수 없는 여러 종류의 사람 가운데 하나로 출가를 제한하였다. 국가 권력이 이렇게 세속에서 신분의 고하나 죄의 유무를 따지고 않고 불교교단으로 출가하는 자를 보호하고 세간의 법으로도 개입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이유는 앞에서 보듯이 “사문석자가 난행(難行)을 하고 고행(苦行)을 하며, 세속의 일을 버리고 열반으로 향하여 나아간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라는 문구에 나타나 있다. 즉 승가를 출세간의 성스러운 영역으로 깊이 인식하였기에 왕들조차도 한 때 자신의 종일지라도 출가자가 되면 예경을 표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도에서는 석가모니 붓다 시대부터 이미 승가는 세속의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출세간성이 인정되고 확립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불교승가는 국가와 밀접한 관계 속에 발전해 갈 수밖에 없는 관계가 시작되었다. 이후 인도불교사는 물론 다른 지역으로 전래된 불교권에서도 불교승가와 국가의 밀접한 관계는 불교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역설적이게도 불교교단의 정치성은 바로 정치권력과 완전히 단절할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출가자의 범죄 가운데 살인과 도둑질의 경우는 출가비구라도 세간의 국법에 따라 제제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은 다음의 계율 조항이 말해준다.

만일 비구가 마을이나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주지 않은 물건을 훔치려는 마음으로 주지 않은 물건을 훔치면 법에 따라 국왕이나 대신에게 붙들려서 죽임이나 결박, 나라 밖으로 추방을 당하거나, 혹은 “너는 도적이다, 너는 어리석다, 너는 아는 것이 없구나.” 하는 비방을 받으면, 이 비구는 바라이이니 함께 살지 못한다. - 《사분율비구계본(四分律比丘戒本)》

기본적으로 국가는 살인이나 도둑질과 같은 범죄를 단속하는 기능과 역할을 한다. 이에 교단은 출가비구가 살인이나 물건을 훔쳤을 때 어떻게 조치했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비구계의 4바라이죄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인 도계(盜戒)와 살계(殺戒)는 이와 관련해 있는데 이는 도계가 제정된 율장의 인연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니야(Dhaniya)라는 비구는 자신의 거처를 짓기 위해 빔비사라왕 소유의 목재를 도둑질하였다. 이는 일반인에 있어서는 사형에 해당되지만 사문이라는 이유로 왕은 특별히 관용을 베풀어 처벌하지 않는다. 이후 붓다는 왕이 감금하거나 죽일 정도의 도둑질을 하면 교단으로부터 추방되는 바라이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한다. 바라이죄는 수행공동체에서 가장 엄중한 죄로 출가 수행자에 있어 사형에 해당한다. 이로써 왕권과의 불화와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붓다의 대응과 조처를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국가는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한다. 이 같은 점에 있어 불교교단에 대한 국가의 입장은 어떠했는지 역시 율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분율(四分律)》에는 “비구에게 수세(收稅)의 법이 없다. 만약 백의(일반인)라면 마땅히 세물(稅物)을 내야한다.”라는 조항이 있고,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에서는 “세존의 제자인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일체 외도 출가인의 물건은 마땅히 세금을 내지 않는다. 만약 매매하면 마땅히 세금을 내야한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문구로 알 수 있는 것은 출가자라 하더라도 물건을 매매하는 경우에는 세금을 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계율에서 출가수행자는 어떠한 종류의 경제활동도 하지 못하게 한 이유를 세금 문제와 관련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세금 문제와 관련하여 교단과 왕권이 예민했던 점은 “탈세하려는 사람과 동행하지 말라.”는 율 조항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조항은 탈세하려는 사람인지 알고도 동행하다가 왕에게 들키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이지만 출가자라는 이유로 훈방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제정됐다. 율장에서는 “탈세하려는 사람과 한 마을을 지나면 바일제죄를 범한 것”으로 규정한다. 즉 왕권과의 불화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계목으로 볼 수 있다. 출가자는 기본적으로 세간 사람들과 달리 무소유를 지향한다. 영리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처 없이 유행(遊行)하는 가운데 걸식과 최소한의 보시물에 의지한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이었다. 따라서 국가가 출가자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할 수 없었을 것이며 대신 이러한 출가자가 이윤을 위해 경제 활동하는 것을 용인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교단의 출세간성은 영리활동과는 무관한 삶의 방식 때문에 허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교단은 어떠한 경제행위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왕권의 개입이나 간섭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또한 일반사회와도 이권과 관련한 경쟁을 피할 수 있어 존경을 받았다.

다음으로 재미있는 것은 출가자의 유산 처분 문제이다. 초기불교의 유행(遊行) 단계에서 출가자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는가는 논란이 될 수 있다. 설령 후대의 정주(定住) 단계를 반영한 율 조항이라도 작금의 한국불교 상황과 비추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존하는 여러 부파의 율장에는 이러한 문제가 기록돼 있다. 출가자의 유산을 ‘망비구물(亡比丘物)’이라 하는데 율장에는 ‘교단에 속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교단에게 처분권이 있고, 출가 전의 친족이나 부모 형제 등에게 귀속시킬 수 없음을 말한다. 왕권과 관련해서 왕에게도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인도에서는 군주제이든 공화제이든 간에 친족이 없이 죽을 경우 재산을 국가에 귀속했다. 이러한 사례는 율장뿐 아니라 경장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십송율》에 발난타 비구가 의발 값으로 30만금(萬金)을 남기고 죽었을 때 꼬살라왕이 비구에게 아들이 없기 때문에 자신에게 귀속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 그 예이다. 하지만 붓다는 사람을 보내 왕이 발란타 비구에게 하사한 봉록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으며 죽은 비구가 승가에 의지해 살았던 이유를 들어 왕의 요구를 단념시켰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발란타 비구가 같은 계급 출신이라는 이유로, 또는 세간 친족들이라는 이유로 유산상속을 주장하는 것에도 출가 후의 취득 재산은 승가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오분율》에서는 출가자의 재산은 부모 형제라도 마땅히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왕이나 왕족이 보시한 땅이나 정사 등의 소유권 문제이다. 고대 인도에서 왕국의 땅은 원칙적으로 왕의 소유로 간주했다. 이러한 점에 있어 왕정이 지원한 승가의 건물이나 원림을 완전히 승가의 소유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율장은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꼬살라왕의 한 부인이 정사를 지어 비구니에 보시했다가 후일 정사를 떠나자 외도에게 다시 보시하여 소유권이 문제가 댔던 일이 《사분율》에 전한다. 당시 관리가 외도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판결했는데, 붓다는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였다고 한다. 비슷한 사례로 왕가와 관련된 일은 아니지만 일반재가자가 라훌라에게 보시했던 방사를 라훌라가 유행을 떠나자 다른 비구에게 다시 보시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붓다는 “먼저 다른 사람에게 보시한 방사를 받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율 조항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율장의 입장은 승가의 보시물은 승가에 귀속하여야 하고, 개개 비구의 보시물은 비구의 소유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율장에서는 “비구들이 분배해서는 안 되는 것, 처분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정사나 정승지·승가람·승가람의 토지·방사·상좌 와구 등의 ‘사방승물’이 있다.”고 규정했다. “사방승물은 승가의 공동재산이기 때문에 현재의 비구들이 마음대로 처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방승물은 국왕이나 시주의 소유를 떠나 있고 승가의 부동산에 대하여 세금을 면제한다는 것이 붓다시대에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불교는 이렇게 세간의 왕권과 출세간의 교권이 기능과 역할을 서로 승인하며 출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간의 왕권과 출세간의 교권은 서로 독립성과 자율성을 최대한 인정했던 정교분리의 차원이라 할 수 있다. 정교분리를 서로 인정했기에 세간적인 이해 관계로 왕권과 교권은 경쟁하지 않았고 왕권은 교단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하였다. 또한 교단의 구성원들이 정치적인 면에서 권력 추구에 나서지 않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탁발과 보시에 의지하는 것과 같이 영리활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출가중은 독신에 엄격한 계율을 지키는 금욕생활로 도덕적인 권위를 보여주었기에 왕권으로부터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는 치외법권적인 출세간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도불교의 출발은 국가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도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출세간의 위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후대 불교는 물론 불교가 전해진 다른 나라에서는 기본적으로 출세간의 영역은 인정되지만 왕권과 관련해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특히 동아시아로 불교가 전해지면서 불교교단을 대하는 국가 권력의 태도에 따라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와는 달리 불교가 정치권력에 종속되고 예속되는 상황도 피할 수 없었다.

붓다 시대와 이후 불교사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세간과 출세간이라는 정교분리가 확립되었을 경우 불교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대로 정교분리가 불완전하면, 즉 왕권과 결탁했을 경우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는 데바닷따의 예가 좋은 교훈을 준다. 그리고 인도불교사에서 숭가왕조와 흉노, 사쌍카, 그리고 이슬람 정치세력의 예를 통해서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재가 간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무력을 앞세운 왕권에 의해 불교는 무력하고 멸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았다.

불교교단의 구조적인 문제에 있어 출가자의 위상과 사회적 역할은 재가자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온전하게 수행된다. 계율 상의 문제와 함께 사표로서 출가자와 승단(僧團)의 사회적 위상은 재가자를 앞세워야 만이 가능하다. 정교분리 원칙과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현대사회는 전적으로 불교교단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정치권력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종교가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사회와 정치계에 불교교단을 보호하고 이웃종교와 관련하여 종교적 문제를 견제할 수 있는 지도층이 필요하다. 한국정치계는 이웃종교의 비율이 압도적이어서 종교편향과 차별이 있어 왔다. 정치권력에 있어 불교교단이 무력화되지 않으려면 정교분리가 제대로 시행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뿐만 아니라 밖으로 유능한 재가 지도자가 정계 등에 진출하여 활동할 수 있도록 후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안으로는 교단의 선두에 있는 출가자의 권위가 선양되는 불교 본래의 제도인 정인(淨人 : kappiyākaraka) 제도가 좀 더 적극적으로 복원되어야 한다. 사회의 지도자이며 도덕적 교사인 출가자가 정치 또는 행정적인 문제로 관공서에 출입하며 시시비비하는 일로 위신을 떨어뜨리거나 경제적인 문제로 시장통에 가서 물건값을 흥정하는 등의 일은 재가자인 정인에게 맡겨야 한다. 불교는 원래 출가자의 계율로써 사찰관리와 유지 등과 관련한 행정과 회계 등을 전적으로 재가자에게 맡겼다. 이는 사회의 스승으로서 출가자의 위의를 손상하거나 훼손하지 않고 불교를 펼치게 하려는 교조의 처방전이었다. 이렇게 될 때 출가중을 정치권력과 사회로부터 외호하는 책임의식이 더욱 깊이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가자도 출가자와 나란히 불교교단의 지도자이며 대변자라는 주인의식과 책임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제도의 도입 또한 필요하다. 초기불교에 나타나는 정교분리적인 입장은 기본적으로 출가와 재가 간의 긴밀한 관계를 성립하게 하는 장치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만이 출가승단은 어떠한 세속권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또 다른 저변이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조준호 |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교수, yathabhut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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