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교, 공인에서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

313년 2월, 로마제국을 동서로 분할하여 통치하던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만났다. 사실상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주도된 이 회담에서 하나의 합의문이 발표된다. 이른바 밀라노 칙령. 이 순간은 세계 역사의 터닝 포인트였다.

전부터 우리(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두 사람은 신앙의 자유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각자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
오늘부터 기독교든 다른 종교든 관계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가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면서.1)


이로써 기독교는 정식으로 공인되고 법의 보호를 받으며 포교할 수 있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의도는 단순히 기독교를 인정하고 박해를 중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교세를 확장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몰수한 기독교 재산을 돌려주고, 교회를 지어 주었다. 황제가 순교자 베드로의 무덤 위에 지은 성당이 곧 오늘날 로마 바티칸 시티의 기원이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매우 옹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종교를 박해하지는 않았다. 그가 니케아 공의회를 개최하여 아리우스 파를 이단으로 판결하는 등의 종교적인 조치를 취하였으나, 이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제국의 통일과 안정을 위해 기독교의 분열을 잠재우려 한 정치행위였던 것이다. 밀라노 칙령 이후 황제는 노예의 사적 처벌을 금지하고, 죄수에 대한 학대를 금하는 법을 속속 제정하였다.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황제로 칭송받기에 부족하지는 않다.

379년 1월, 30대 초반의 젊은 장군 테오도시우스가 공동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384년 새로 수도장관에 임명된 심마쿠스(Symmachus)는 서로마의 어린 황제-당시 12세의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보고되리라는 걸 알고 쓴 것이며, 내용은 철거된 승리의 여신상을 원래대로 복원해 달라는 탄원이었다.

옛날 황제들은 그 이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신들을 경배했고, 요즘 황제들도 경배는 하지 않을망정 배척은 하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옛날의 예를 답습할 마음은 나지 않는다 해도, 최근의 예를 존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폐하께 간청하는 것은 단순히 여신상의 철거를 철회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어릴 적에 아버지한테 배운 것을 우리도 자식한테 가르칠 수 있는 상황으로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모두 같은 별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하늘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같은 우주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밑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이 의지하는 지주가 달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한 문제이겠습니까. 그렇게 큰 삶의 비밀을 풀어주는 길이 단 하나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2)


전통을 지키며 살게 해달라는 것과, 진리가 도달하는 길이 꼭 하나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달라는 것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당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에게도 알려졌다. 주교도 황제에게 편지를 썼다.

고명한 로마의 장관이 폐하께 영원한 도시가 올리는 탄원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낡은 종교의 존속을 호소한 것을 알고 이렇게 펜을 들 마음이 났습니다.……저는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 부끄러운 것은 잘못을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
심마쿠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비밀에 다가가는 데 하나의 길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비밀일지 몰라도, 우리 기독교도에게는 신의 목소리로 해명되어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그들이 탐구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는 신의 예지와 진리를 통해 벌써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이교도들의 생각과 우리 생각 사이에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습니다.……우리 기독교도를 비난하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파멸의 날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태양이 암흑을 몰아내줄 테니까요.
……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무지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는 법률이 진실을 보여주었다고 믿어온 문명이 붕괴한 자리에,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을 용기를 가진 사람들 위에 빛나게 될 것입니다.
3)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기독교도들에겐 광명이, 이교도들에겐 암흑의 파멸만이 기다린다. 찬란한 영광은 과거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세운 자들만이 누린다. 암브로시우스의 주장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과연 그랬다. 콘스탄티누스가 종교와 신앙의 관용을 외치며 기독교를 공인한 지 불과 한 세기도 안 되어 기독교는 유일 절대적인 진리로 등극하였다. 기독교 이외의 종교나 철학은 이교로 배척되었다. 로마의 오랜 미덕이었던 관용의 정신은 이교에 대한 박해와 이단에 대한 공격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유일한 국교로 선언하였다. 비기독교의 모든 제례와 의식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2. 옛 체제를 파괴하고 새 질서를 세워라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의 일이다. 기독교인 황제를 등에 업고 한 기독교도가 시리아 북동부에서 유대교 회당을 습격하여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황제는 그곳 행정관에게 범인을 엄중히 처벌하라는 명령과 동시에 그곳 주교에게는 교구의 비용으로 유대교 회당을 재건하여 주라고 명령하였다. 이를 안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황제에게 엄중한 항의문을 보냈다. 이교의 시설에 기독교회의 재산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기독교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자신의 결정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여 그의 항의를 무시했다. 그리고 얼마 후 황제가 참석한 교회 행사에서 암브로시우스는 유대교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동시에 신의 은혜를 망각하는 일은 황제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황제는 유대교 회당을 습격한 범인을 엄히 처벌하고 기독교회의 비용으로 유대교 회당 건립비용을 대라는 명령을 철회했다. 나아가 황제는 비기독교도는 로마법에 의한 보호를 받을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390년에는 그리스 테살로니키에서 한 인기 만점의 전차경주 선수가 사소한 일로 감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났다. 군중들은 감옥으로 몰려가 자신들의 우상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경찰이 거부하자 군중은 폭동을 일으켜 장관과 많은 행정관들이 살해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황제는 군대를 보내 진압하였고, 진압 과정에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엄중한 항의문을 황제에게 보냈다. 강경 진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황제는 속죄의식을 행하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황제의 교회 출입은 금지되었다. 8개월을 버티다가 마침내 황제는 모든 황제의 상징물을 제거한 소박한 차림으로 교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용서를 받은 다음에야 황제는 교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로부터 2년 후 기독교는 로마의 유일한 국교가 된다.

이렇게 세속권력은 종교권력에 종속되었다. 391년 6월 16일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모든 이교도의 신전을 폐쇄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동시에 하나님의 분노를 사고, 경건한 자들을 오염시킨다는 이유로 기독교에 적대적 모든 책을 태워버릴 것도 명령했다. 황제의 명령은 기독교의 광신도들에게는 축제의 개회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을 딴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당대 최고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대왕의 사후 이집트에 들어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학문 발전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에 왕립 종합학술원격인 무세이온(Mouseion)을 세우고 대학과 도서관 그리고 신전을 지었다. 이른바 ‘알렉산드리아의 대 도서관(Bibliothèque de Alexandrina)’은 한때 70만 권에 달하는 방대한 두루마리 장서를 비치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타자기가 발명되기 이전 유럽 전체 도서관 장서수의 10배나 되는 양이라고 한다. 그리고 세라피스(Serapis)를 모신 신전은 이집트 전통 신앙의 총본산이었다. 이 신전과 도서관은 이미 폭도로 화한 기독교 광신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냥터였다.

신앙열에 불타는 한 겁 없는 병사가 무거운 전투용 도끼로 무장하고 사다리를 오르자, 그리스도교인들조차도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그가 온 힘을 실어 세라피스 신상의 뺨을 가격하자 뺨이 떨어져 나와 땅 위에 굴렀다. 그러나 천둥은 치지 않았고 하늘과 땅도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승리감에 취한 이 병사는 신상을 계속 쳐서 거대한 우상을 쓰러뜨려 산산조각 냈다. 세라피스 신상의 사지는 치욕스럽게도 알렉산드리아의 온 거리를 끌려 다녔으며, 토막 난 잔해는 대중의 환호 속에 원형 경기장에서 불태워졌다. 자기들의 수호신이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개종을 선택했다.4)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그리고 있는 파괴 당시의 모습이다. 기번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지 불과 60여년 만에 로마 제국의 신전들은 거의 다 파괴되었다고 한다. 대 도서관의 서적들 또한 모두 끌어내어져 불살라졌다. 영화 《아고라》에는 이 파괴의 장면이 재현되고 있는데, 불태워지는 두루마리 책들은 영화보다 훨씬 더 많았으리라 여겨진다. 아마도 책들이 다 타는 데에만 꼬박 하루 이상은 걸리지 않았을까.

3. 히파티아. 아! 히파티아

▲ 찰스 윌리엄 미첼, 〈히파티아〉, 1885.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는 한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이 그려져 있다. 히파티아(Hypatia, 355〜415). 그녀의 제자이며 프톨레마이오스의 주교였던 키레네의 시네시우스(Synesius)에 의하면 그녀는 “플라톤의 머리와 아프로디테의 몸”을 지닌 여인이었다. 수학자 테온(Theon)의 딸로 태어나, 수학과 철학, 문학과 예술을 두루 익히고,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서도 군계일학처럼 빛났던 여인. 아일랜드의 계몽사상가 존 톨런드(J. Toland)는 ”히파티아 또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결하고 가장 학식이 높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성, 그러나 흔히 성인이라는 부당한 칭호가 붙은 대주교 성 키릴루스의 자만심과 경쟁심, 잔인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성직자들에 의해 조각조각 찢긴 여성의 역사“라는 긴 제목의 에세이를 그녀에게 바쳤다.

외삼촌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테오필루스(Theophilus)에게서 수사학과 철학, 신학 등을 배운 키릴루스((Kyrillos)는 412년 외삼촌이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곧바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되었다. 이 야심만만한 종교권력자는 세속권력자였던 로마의 행정관 오레스테스를 지배하고자 하였다. 질투와 야망이 범벅이 되어 오레스테스를 지지하던 히파티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키릴루스의 사주를 받은 검은 옷과 짧은 머리의 광신도들에 의해 히파티아는 마차에서 끌어내어졌다. 그녀는 벌거벗겨지고 머리칼이 마차에 묶여진 채 끌려 다니다가 날카로운 굴 껍데기로 온 몸이 낭자되었다. 그리고 불에 태워지고, 타다 만 시신은 짐승의 먹이가 되었다고 한다. 한 고대 로마의 무명시인은 히파티아를 기억하라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히파티아를 기억하라
분별력의 딸이 어떤 신앙에도 지배당하지 못할 때
아버지 하나님 그의 자식들의 질투가 시작되고
신의 이름 로고스의 갈등은 순백색 망토를 물들인 검붉은 핏빛

“나는 진리와 결혼했노라.”

진실의 눈은 영혼임을 외치는 순결함
미모 무상을 깨우치는 모든 존재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궁극적인 원인은
철학의 신에 이루기를 독려한다.

“이 처녀의 죄명은 무엇이오?”
“저 요사한 마녀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수학자임이 죄요.”
“다음 죄명은 무엇이오?”
“인간이 만든 지식으로 신을 평가한 것이요.”

“저 요사한 마녀를 발가벗기고 능욕하라.”
“성전으로 끌고 가 불태워 죽여라.”

이것이 아버지 뜻이니라.
인간 본성의 신성이 화형당할 때
불쌍한 영혼들의 다독거림은
진실한 눈은 영혼의 각성을 촉구한다.
인간의 신성은 지혜의 열매를 꿈꾸는 자
우리의 과실을 인간 본연의 신성의 이름으로
아테네 학당에 새겨진 분별력의 딸을 기억하라.
5)

히파티아는 죽고 키릴루스는 가톨릭 성인이 되었다. 암브로시우스도 역시 성인이 되었다. 히파티아의 죽음은 고대 그리스ㆍ로마 문화의 종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고대의 구체제가 파괴된 자리에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다. 다양성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진리만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들은 진리의 찬란한 빛이 우주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말하였으나, 후대의 사람들은 암흑시대로 기억하였다.

주) -----
1) 시오노 나나미, 김석희 옮김, 《로마인 이야기》.
2) 위의 책.
3) 위의 책.
4) 에드워드 기번, 윤수인 김희용 옮김, 《로마제국 쇠망사》, 민음사.
5) 남태우 저, 《알렉산드리아 대 도서관》, 한국도서관협회. 찰스 윌리엄 미첼, 〈히파티아〉, 1885

김문갑 | 철학박사·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meastr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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