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최순실사태’로 불리는 일련의 ‘사태’를 접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그리고 지금이라는
구체적 ‘시간’ 속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 물론 이 ‘사태’ 자체가 복잡한 구조로 얽혀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사태’에 반응하는 양상들은 서로 모순적으로 까지 드러난다. 그 중의 한 예로 ‘촛불집회’와 ‘맞불집회’를 들 수 있다. 한쪽은 대통령이 물러나야 할 정도로 잘못했다는 주장이고, 다른 한쪽은 그럴 정도의 잘못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국회의사당에 모인 의원들도 그런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전 국민은 이 ‘사태’에 대한 자기 의견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사태’인데 왜 이렇게 모순적인 주장이 나올까? 이렇게 되게 된 데는 ‘사태’를 인식하는 방법과, 그렇게 인식된 지식의 내용을 논증하는 형식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정보의 사실 여부와, 그 ‘사태’를 규정하는 법률의 적용과 해석과 관련되어 있다. 우선 법률의 적용과 해석은 이 분야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담당하는 법조인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행위의 사실 여부이다. 이 문제는 죄를 지은 당사자의 고백과, 또는 죄를 추궁하는 검찰 측의 증거제시에 의존하게 된다. 이 과정에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첫째는 죄 지은 당사자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사실을 숨기는 것이고, 둘째는 검찰 측이 어떤 이유이든 증거제시를 못하는 것이다.

2.
여기에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은폐’이다. ‘숨기는 것’ 말이다. 작년에 통계청은 종교인구 조사에 대한 결과를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종교인구는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약간 못미치고 있다. 종교인구 통계는 개신교 신자가 제일 많고, 그 다음으로 불교 신도이고, 그 다음으로 가톨릭 신자 등등으로 집계됐다. 현대 사회에서, 그리고 이 정도의 경제적 발전을 이룬 국가에서, 절반 정도의 국민이 종교를 믿는다면 이는 적지 않은 숫자이다. 이들 종교에서, 크게 볼 때에 불교에서는 ‘업’ 사상을 믿고 있다. 자신이 지은 행위는 그것이 몸으로 짓건 말로 짓건 마음으로 짓건 반드시 제자신이 받는다는 것이다. 기독교(개신교와 가톨릭)에서는 ‘아버지 나라의 심판’을 믿는다.

‘최순실사태’를 둘러싸고 ‘은폐’ 내지는 ‘숨기는 것’이 언론을 통해서 날마다 쏟아지고 있다. 이렇게 종교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어떻게 이리도 거짓말이 넘칠 수 있을까? 불자들은 부처님이 시방세계에 항상 계신다고 매일 매일 삼시 세 때 예불마다 고백한다. 교인들은 전지전능하고 모든 곳에 항상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한다.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 단체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나? 종교는 자기 종교 속에서 지향하는 제일의 가치만(성불 또는 구원) 중요하고 세상의 가치는 무시해도 되는가?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우리 후손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3.
배우고 가르치는 장소로서, 첫째는 가정을, 둘째는 학교를, 셋째는 사회를 꼽을 수 있다.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이 파행적으로 가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순실사태’를 통해서 우리사회는 큰 학습을 하고 있다. 자신이 한 일을 ‘숨기는 것’이 과연 자신에게 득이 되냐 실이 되냐를 온 국민이 배울 것이다. 요즈음 자주 쓰이는 말로 ‘합리적 의심’이 곳곳에 드러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사태를 인식하고 주장하는 방법과 형식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또 학습할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사태의 본질’은 뒷전으로 돌려두고, ‘제 편 두둔하기’를 하는 것이, 득이 되냐 실이 되냐를 배울 것이다. 안타까운 심정을 떨쳐버릴 수 없어 회초리 드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진정한 위함이냐 아니냐를 배울 것이다. 역사는 현재이고 순간이다. 이런 역사 현장 속에서 진정으로 이 나라를 보호하고 염려하여 행동하는 최고 지도자 뽑기를 금년에 또 배울 것이다.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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