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사별한 지소 부인 온갖 고난 극복하고 아들 즉위
대가야 정복·한강유역까지 영토 확장 ‘신라 강역 확장’
 

제24대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15세여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진흥왕은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7세 혹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4 ‘진흥왕’ 조에는 7살에 즉위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다른 기사들은 몰라도 15세 즉위 기사는 잘못이 있는 듯하다. 지금처럼 재벌 부모만 믿고 폭행도 서슴지 않는 금수저들도 15세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면 엄마를 섭정으로 앉히지는 않을 듯하다. 약관의 나이는 되지 않았어도 15세는 굳이 섭정이 필요할 나이로는 좀 많은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는 진흥왕의 즉위 연도는 7세가 옳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건 상식이고 역사에 상식이니 보통이니 평범이니 하는 말이 들어맞는 적이 별로 없으니, 15세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효자였는지 아니면 좀 많이 모자랐는지, 아니면 법도가 워낙 엄한 나라여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물론 태후라는 분이 무척 힘이 세고, 태후의 후광을 입어 왕이 되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정략적인 판단이라면 15세에도 섭정할 수 있다. 아니 태후가 잘만 버텨준다면 불혹의 나이인 40세까지 섭정해도 좋을 듯싶다. 여하튼 전쟁에 가까운 치열한 왕위 계승전을 통과하려면 합종연횡이 필요했으니, 나이야 7세든 15세든 별 의미가 없다. 결국 황후가 어떤 사람인지 좀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로서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부인이었다. 왕은 임종할 때에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운명했다.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진흥왕의 어머니가 지소부인(只召夫人), 혹은 식도부인(息道夫人) 박 씨로 영실 각간의 딸이라 하였다. 그러나 박 씨 식도부인은 진흥왕의 어머니가 아니라 진흥왕의 비이다. 한편 지소부인은 울주 천전리 서석 명문에 보이는 ‘지수시혜비(只須尸兮妃)’와 동일인이다. 그러니 어머니는 지소부인이고 부인은 식도부인이라고 하면 좋다. 하지만 그건 정리하는 사람에서 좋은 것이고, 식도부인이 계모이거나 입종갈문왕의 첩이었고 나중에 진흥왕과 새로 결혼했을 수도 있다. 물론 파천황적이고 지금으로 봐서는 비윤리적인 일이겠지만, 근친혼이 성행하고 다처다부제와 같은 모습도 보이는 《화랑세기》 필사본이 신라사회의 왕실사회를 착실하게 담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소부인의 남편인 입종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이다. 울진 봉평신라비에는 입종을 ‘사부지(徙夫智)’라 하였고, 울주 천전리 서석에는 ‘사부지(徙夫知)’로 표기하였다. 그는 왕의 동생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므로 갈문왕에 봉해진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입종 역시 그의 딸이나 여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살펴야 한다. 풍부했던 고대, 특히 신라 사료들이 재정리되는 과정에서 가부장제적인 유교 풍습이 영향을 끼쳐서 그렇지, 아들보다 딸이나 여동생이 더 귀했던 사회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순암 안정복이 말한 “비후의 부” 즉, 비나 태후가 되었던 사람의 아버지 또는 그의 아들(동생)로 왕자와 공주들의 외조부나 외삼촌이 갈문왕일 가능성이 크다. 일제 침략기와 한국전쟁을 거치지 않은 순암의 생전에는 지금보다 더 많은 자료가 남았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여하튼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 씨같이, 남편이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은 입종갈문왕의 부인이었다. 입종갈문왕이 살았으면 흥선대원군처럼 섭정을 했을까? 아니면 왕이 되었을까? 여하튼 스토리텔링이라는 입장에 서면 남편을 사별한 가련한 지소부인이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아들을 왕으로 즉위시킨 시나리오가 가장 극적이고 인기가 높을 듯하다.

여하튼 엄마 덕으로 왕위에 오른 진흥왕은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왕은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신라의 강역을 크게 확장시켰다. 그리고 그 유명한 순수비들을 여러 곳에 세웠다. 새로 획득한 땅들을 돌아보는 것을 순수라고 했는데, 부동산을 그리 많이 획득했으니, 죽기 전에 한번 꼭 보이고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엄마 등쌀이 무서워서 바람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니 예쁜 처첩들 데리고 유람을 갔을 수도 있다. 수로부인도 걸었던 동해 바닷길을 따라서 북으로 북으로 가마도 타고 배도 타는 여행. 남들은 힘들었겠지만 왕이라면 해볼 만하지 않았을까?

여하튼 창녕은 물론이고,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를 세웠다. 문제는 왕의 이름 진흥이 죽은 후에 붙여지는 시호라고 《삼국사기》라고 말한 점이다. 그러나 순수비에 이미 사용되고 있으므로 생존 시 칭호였음이 확인되었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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