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오늘날 한국 스님 네들이 불교의 대사회 역할이 부족하다고 자평함과 동시에 사회현실에 보다 혁신적으로 일익을 담당해야함을 요구한 것이라 하겠다. 또한 불교의 철학화, 불교의 종교화보다는 불교의 사회화라 할 수 있는 활발한 움직임이 지금 불교에서 절실히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라는 명제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깨달음이 독야청정(獨夜淸淨)이 아니라는 데에 그 무게가 있고 그 깊이가 있다. 불교는 자신과 모든 존재현상이 본래 둘이 아니고[自他不二] 모든 현상들이 반드시 상호연관 속에서 일어남[一切緣起]을 그 근본으로 하듯이 시간적·공간적으로 얽혀있는 나 이외의 이웃을 절대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아함》1권에서는 “만일 자신에게도 이익됨은 물론 다른 이와 많은 사람들도 이익케 하고 세간을 가엾이 여기며 인천(人天)을 위해 이치와 이익을 구하고 편안함과 쾌락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그 사람들 가운데 제일 위대하고 높고 우두머리이고 뛰어나고 존귀하고 미묘하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평등(平等) 자비(慈悲) 보은(報恩)을 수차례 강조하신 바가 있듯이, 자신은 물론 이웃을 위한 사회적 실천은 불교의 태생에서부터 한 축이다. 이러한 가르침들을 좇아 억압과 핍박 속에 아우성치는 약자들에게 행복을 열어주는 적극적인 역할 수행이 지금의 불교가 소극적인 포교와 은둔을 위주로 하는 종교라는 전통적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오늘의 한국을 다종교 다문화사회로 말하는 것은 이제 식상하다. 권력의 시퍼런 칼날이 휘둘리고 있을 때 대안 없는, 행동 없는 외침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대방광보협경(大方廣寶篋經)》중권에서 “일체가 안락해 고뇌가 없는 법을 불법(佛法)이라 한다”고 했듯이, 불교의 완성은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이 사회에서 같이 숨 쉬고 같은 해를 이고 있는 이웃들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달래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법진 스님/본지 발행인
법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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