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참된베풂, 선학원
   
> 뉴스 > 지난연재보기 | 영화에서 불교보기
     
63. 일로 일로
금융 위기를 소재로 자본주의의 인간성 상실 조명
2017년 01월 06일 (금) 09:39:24 김은주 cshchn2004@naver.com
   

1997년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해입니다. ‘IMF 외환위기’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가장이 실직하고, 그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고, 자살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전쟁에 버금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우리처럼 금융위기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공유했던 아시아인은 공통된 기억을 갖고, 공통의 정서를 가졌습니다.

영화 <일로 일로>(싱가포르, 2013)는 1998년 경제 위기가 한창이던 시절 싱가포르의 한 중산층 가정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문제로 위기에 내몰리는 가정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취약성을 비판하고, 한편으로는 소년과 필리핀 가정부의 우정을 통해 인간성 회복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돈으로 인해 오히려 불행에 빠지게 된다는 설정은,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단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구조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물질이 아닌 사람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보여줌으로써 물질주의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합니다.

맞벌이를 하는 자러의 엄마는 택배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임신상태였습니다. 엄마 링은 회사일과 가사 일을 병행할 수 없어 필리핀 가정부 테레사를 고용했습니다. 이런 결정에는 말썽꾸러기 아들 자러도 한몫했습니다.

자러는 엄마 아빠가 맞벌이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고,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제대로 된 애정이나 교육을 받지 못하다 보니 정서적으로 안정이 안 돼 있었습니다. 집에서는 게임만 하고, 학교에서는 친구를 때리거나 선생님에게 반항해 말썽꾸러기로 낙인찍힌 아이였습니다.

이런 자러와 필리핀 가정부 테레사 사이엔 어느 것 하나 일치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자러는 남자 테레사는 여자, 자러는 12살짜리 소년 테레사는 한 돌 된 아들을 둔 아줌마, 자러는 싱가포르인이고 테레사는 필리핀인 등 다른 것뿐이었습니다.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테레사를 자러는 거부했습니다. 그렇지만 테레사는 고향에 두고 온 아들을 대하듯 자러를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자러가 교통사고를 당해 팔에 깁스를 했을 때는 엄마처럼 친밀하게 목욕시켜주고, 등·하교를 함께 하고, 또 자러가 학교에서 친구를 때려 퇴학 위기에 처했을 때는 진심으로 자러를 걱정하며 교장선생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자러는 테레사의 이런 마음을 눈치 챘습니다. 어른보다 빨리 상대의 진심을 깨닫고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외할머니 생신 때 방에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테레사 혼자 밖에서 식사를 하게 되자 자러는 자신도 테레사 옆으로 와서 함께 밥을 먹고, 또 자신의 몫인 샥스핀을 테레사에게 양보하기도 했습니다. 자러의 테레사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자러와 테레사 사이에는 따뜻한 우정이 생겨났습니다. 정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살았던 소년은 필리핀 가정부에게 마음을 열었고, 둘 사이엔 따뜻함이 느껴졌는데, 둘의 우정이 영화에서 무척 매력적이게 묘사됐습니다. 리얼리티가 느껴지는 관계였는데 이는 감독의 자전적 얘기였기에 가능했습니다.

감독은 실제 12살까지 필리핀 가정부에게서 자랐고, 그녀가 떠날 때 무척 슬펐다고 했는데 그 경험을 영화로 그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인 <일로 일로>는 필리핀 가정부의 고향 도시라고 합니다.

젖먹이 아이를 떼놓고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일자리를 찾아 싱가포르로 온 테레사는 무척 어른스럽고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집 아들이지만 아이가 잘못했을 때는 단호하게 혼내고, 또 평소에는 엄마처럼 따뜻하게 돌봤습니다. 아주 가난하던 시절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았던 엄마들의 모습과 유사했습니다. 가난하지만 건강함과 희망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반면에 자러의 엄마는 서툰 엄마였습니다. 아이의 공부를 봐줄 수는 있지만 아이에게 맛있는 밥을 만들어 주지도 않았고, 비가 오는 날 학교로 우산을 가져가지도 않았으며, 팔을 다친 아이를 대신해 가방을 들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공부하라고 다그치고, 말썽을 부린다고 혼내는 그런 엄마였습니다.

사실 엄마는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만삭의 몸으로 회사에 다니는 것도 버거운데, 당시 회사는 정리 해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역할은 정리 해고자의 서류를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녀도 회사의 눈치를 끊임없이 봐야 했습니다. 자신도 언제 회사에서 쫓겨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외동아들 자러는 테레사를 엄마인 자신보다 더 따랐습니다. 테레사가 해주는 밥이 더 맛있다고 하고, 식탁에서 밥 먹을 때도 아들과 테레사 사이엔 많은 대화가 오갔고, 엄마인 링은 그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가끔은 “내가 엄마야!” 하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곤 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는 모습이었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자신의 자리는 점점 사라져만 갔습니다. 그녀는 지치고 불행했습니다. 길가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던 엄마의 모습은 그녀의 삶이 무척 버겁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녀는 희망을 찾고 싶어서 길바닥에서 주운 전단지의 강사를 찾아갔습니다. ‘내 안에 희망이 있다’고 열변을 토하는 강사의 강의를 듣고 엄마는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의지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사기꾼이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 정리 해고된 아버지는 가족들 몰래 공장 경비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주식에 손을 댔다가 큰돈까지 잃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엄마와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넘쳐났습니다.

1998년 무렵의 아시아 금융위기, 이 시기는 이렇게 다들 불행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사람들의 불행히 단순히 경제적 몰락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불행의 이유는 분명 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 가정에서 인상적인 것은 대문입니다. 현관문이 마치 감옥의 쇠창살 같았습니다. 밖의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문을 열지 않은 채 그 창살을 마주보고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 게 느껴지는 장치였습니다. 그래서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고립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아시아는 동반 금융위기를 겪었고, 사람들의 불행은 최고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삭막했습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오랜 기간 함께 일해 온 동료를 너무나 쉽게 잊었고, 믿지 못해서 가정부의 여권을 빼앗고, 또 이웃집 아줌마는 가정부에게 심부름을 시키면서도 그녀를 믿지 않았으며, 외갓집 사람들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가정부를 차별했습니다.

신뢰, 사랑, 이런 훈훈한 마음은 결코 느낄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른 체 사람들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습니다. 어른들의 이런 삭막한 삶에서 아이들은 소외되고, 아이들은 더 삭막한 어른으로 자라게 되는 게 현실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보여준 현실은 우리나라의 실정과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나름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필리핀 가정부가 비록 돈을 벌기 위해 갓난아이를 두고 다른 나라로 왔지만 그녀는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년 자러가 그녀의 마음을 알았던 것처럼 비록 삭막한 현실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야 한다고 영화는 말했습니다.

자러네 집의 경제적 문제로 테레사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마지막에 엄마가 테레사를 떠나보내면서 그녀에게 립스틱을 선물했는데 이는 엄마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원래 엄마는 테레사를 가정부로만 대했습니다. 그녀를 믿지 않았으며, 자신의 버리는 옷을 주고, 근무시간을 체크했습니다. 조금도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았는데, 그랬던 그녀가 립스틱을 선물했다는 건 테레사를 인간으로 대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보다 인간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금융위기와 같은 돈 문제가 생기더라도 덜 힘들 것이라고 영화는 말했습니다.

결국은 돈이 아니라 인간에게 마음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영화는 아시아 금융위기라는 소재를 통해 자본주의의 인간성 상실 문제와 함께 미래 세대에 대한 걱정 등을 잔잔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영화로 안소니 첸 감독은 칸느영화제의 신인 감독상이라고 할 수 있는 황금카메라상과 함께 다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했습니다. 동시대를 통찰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공적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맨 얼굴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열심히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느 순간 벤치에 불행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엄마의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열심히 살지만 결코 행복하지 못한 모습, 이유는 돈이었습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을 사람보다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김은주의 다른기사 보기  
ⓒ 불교저널(http://www.buddhismjournal.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신문사소개 | 기사제보 | 광고문의 | 불편신고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청소년보호정책
03061 서울특별시 종로구 윤보선길 35-4 (안국동) 재단법인 선학원 내 | 전화 02)720-6630 | 전송 02)734-9622
등록번호 서울특별시 아00856 | 등록일자 2009년 5월 8일 | 발행일자 매주 목요일 | 발행인 최종진 | 편집인 김충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종진
Copyright 2009 불교저널.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udjn200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