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불승 균여(均如, 923~973)는 속성이 변씨(邊氏)였으며 본관은 황주(黃州)이다. 균여는 황해도 황주 북쪽 형악(荊岳) 남쪽 기슭에 있는 둔대엽촌(遁臺葉村)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누런 봉 한 쌍이 내려와 품속에 드는 꿈을 꾸고 6년 뒤, 나이 60에 임신해 7개월 만에 균여를 낳았다. 아버지는 환성(煥性)이며, 어머니는 점명(占命)이다. 그의 부친은 아마 황주 지역에 토착적 기반을 둔 군소토호였을 가능성이 있다. 가문은 한미했던 것 같다.

균여는 화엄 교리의 거장이었을 뿐 아니라 신이(神異)한 자취를 남긴 고승이었다. 균여는 964년(광종 15)에 광종이 그를 위해 송악산 아래에 창건한 귀법사의 주지로서, 왕명에 따라 향화(香火)를 받들며 민중을 교화하고 불법을 널리 펴다가 973년(광종 24) 6월에 입적, 팔덕산(八德山)에서 장례를 지냈다.

균여는 우리나라 화엄종에서 그 초전자(初傳者) 의상(義湘)에 이어 고려 때에 교풍을 바로잡고 교세를 떨친 화엄학의 고봉으로서, 80권의 경을 개강(開講)하고 향찰을 구사해 종의(宗義)를 풀이하는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향가를 지음으로써 국문학사상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술로는 《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 10권, 《공목장기(孔目章記)》 8권, 《오십요문답기(五十要問答記)》 4권, 《탐현기석(探玄記釋)》 28권, 《교분기석(敎分記釋)》 7권, 《지귀장기(旨歸章記)》 2권, 《삼보장기(三寶章記)》 2권, 《법계도기(法界圖記)》 2권, 《십구장기(十句章記)》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 1권 등이 있다. 《교분기석》·《지귀장기》·《삼보장기》·《십구장기》는 해인사 고려대장경 보판(補板)에 각각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鈔)》 10권, 《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華嚴旨歸章圓通鈔)》 상·하, 《화엄경삼보장원통기(華嚴經三寶章圓通記)》 상·하,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

균여 화엄사상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언명(言明)이 ‘성상융회(性相融會)’이다. 본래 성상융회사상은 화엄 사상을 근간으로 그 내에 법상종 사상을 융합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성상융회사상은 공(空)을 뜻하는 성(性)과 색(色)을 뜻하는 상(相)을 원만하게 융합시키는 이론으로서, 화엄사상 속에 법상종의 사상을 융합해 교종 내의 대립을 해소시키기 위해 주창한 통합 사상이다. 균여가 원통대사(圓通大師)로 불리었고, 그의 저술에 ‘원통’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광종이 군소 토호세력을 왕실 측근으로 포섭하여 왕권을 강화해나가는 전제정치와 표리 관계에 있었다. 왜냐하면 화엄종이 전통적으로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다면 법상종은 통일 신라 이래로 그 사회 중류 이하의 지식인, 즉 군소 토호층에 의해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조금 자세하게 보자. 우선 선종 사상이 만연된 분위기 속에서 고려 왕실은 화엄종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고려 초에 중국으로부터 대장경이 수입되기도 하거니와 《화엄경》의 사경(寫經)이 빈번하게 행해졌다. 그리하여 왕실의 비호를 받은 화엄종의 세력은 크게 신장되어 광종 초에 이미 화엄종 승려인 겸신(謙信)이 국사에 봉해지기도 했다.

화엄종과는 별도로 후삼국시대엔 법상종이 점점 대두하게 되었다. 현상계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려는 법상종 사상은 선종 사상과는 맞지 않아서 신라 하대 선종이 풍미하는 분위기 속에서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상종은 계율을 강조하는 면이 강하고 그것의 신앙층이 군소토호였다는 데서 후삼국 지배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려 초에 법상종 세력은 점차 힘을 얻게 되었다.

균여의 성상융회사상은 구체적으로 화엄종과 법상종의 융합사상이지만, 논리적으로는 비로자나불을 정점에 두고 이(理)와 사(事), 혹은 성(性)과 상(相)을 통합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성상융회사상 속에 통합된 성과 상, 즉 이와 사는 존재의 유무를 초월한 혼연일체를 이루게 된다. 이것은 전제군주제도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

신라 화엄종의 주류는 의상계였다. 균여 화엄사상은 의상 화엄사상의 전통을 이어받아 원교(圓敎)로서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균여는 의상화엄(義湘華嚴)과 법장화엄(法藏華嚴)을 횡진법계(橫盡法界)와 수진법계(竪盡法界)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의상의 횡진법계는 전체의 하나하나를 파악하기보다는 원칙적인 일(一)을 파악하고 전체를 이로 미루어 이해하려 한다. 법장의 수진법계는 전체를 파악하고자 할 때 그 구성된 하나하나의 의미에 집착한다. 균여는 두 법계관을 종합한 독창적 화엄 사상인 ‘주측(周側)’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횡진법계를 근간으로 하고, 그 위에 수진법계를 융회하려는 사상이다. 이때 ‘가로’, 또는 ‘수평’의 의미를 지니는 주(周)는 횡진세계를, ‘세로’, 또는 ‘수직’의 의미를 지니는 측(側)은 수진세계를 뜻한다. 즉 일(一)속에 전체를 통합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의 의미를 음미해보는 것이다. 균여는 ‘주(周)’와 ‘측(側)’의 개념을 원용하여 본성(性)과 표상(相)을 융회시킴으로서 법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로 갈라져있던 당시 고려 화엄사상계의 분열을 원교(圓敎)의 입장에서 총섭(總攝)하고자 한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해동 화엄종의 주류인 의상 화엄사상 아래에서 중국 화엄과 해동 화엄을 융회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더하여 그의 화엄사상 속에는 순수 교리적인 측면보다는 토착적 신앙을 내세우는 신이한 측면이 강조되었다. 이는 서민적이고 세속적이었던 균여의 사상 경향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실제 균여의 <보현십원가> 속에도 ‘성속무애(聖俗無碍)’의 사상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성과 속은 물론 동방과 서방, 남녀나 귀천까지 융합하려는 강력한 통합 사상으로서, 성상융회사상에 기초하여 주창한 것이다.

균여의 성상융회사상은 법장의 그것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두 사람의 사상은 근본적인 면에서 상당히 다르다. 균여의 성상융회 사상은 성기취입적(性起趣入的)이며 전개후합(前開後合)의 성격을 지녔다면, 법장의 그것은 연기건립적(緣起建立的)이라서 전합후개(前合後開)의 성격을 지녔다. 전자가 이·사로 성과 상을 나눌 뿐 아니라 섭말귀본(攝末歸本)의 입장에서 사상의 존재를 인정하려 하기보다 그것의 융합을 더 중시한다면, 후자는 공(空)·불공(不空)으로 성과 상을 나누며 과상현(果上現)의 입장에서 나타난 사상(事相)의 존재를 중시한다. 따라서 전자가 평등한 성격이라면 후자는 차별상을 가진다. 성기취입적이며 사상의 융합을 내세우는 이러한 균여의 성상융회 사상은 오히려 징관(澄觀)의 성기설(性起說)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균여는 법장의 저술을 주석하고 있지만 그 사상은 오히려 징관의 그것에 더 가깝다. 그러나 균여사상과 법장사상의 보다 뚜렷한 차이는 전자가 이리무애(理理無碍)를 중시한데 비해 후자는 사사무애(事事無碍)를 중시한다. 그런데 징관 역시 사사무애를 중시하며, 균여는 이리무애를 중시한다.

결론적으로 균여의 사상은 겉으로는 법장을 주석하고, 때로는 그 안에서 징관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의상과 연결된다고 하겠다. 균여의 화엄사상은 고려 중기의 의천(義天, 1055~1101)에 의해 심하게 배척당했다. 의천은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저술하면서 의식적으로 균여의 저술을 제외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는 그것을 읽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 무신란 이후 조계종이 크게 일어나면서 균여의 화엄사상이 다시 주목되어, 당시 조판된 고려대장경 속에 균여의 저술이 포함되었다.

이덕진 | 창원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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