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스런 이름, 순교자

《황금전설》이란 꽤 두꺼운 책이 있다. 13세기 이탈리아 제노바의 대주교 보라기네의 야코부스가 저술한 책으로 전설처럼 내려오는 13세기 이전 가톨릭 성인들의 생애와 업적을 다루고 있다. 내용은 주로 순교(殉敎)에 얽힌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세 때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고 한다. 이후로도 많은 예술가와 작가에게 영감을 주어 무수한 미술과 문학 작품을 창조하는 원천이 되었다. 이제 《황금전설》에 나오는 성자와 성녀 이야기 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를 발췌하여 시간 순으로 서술해 본다. 𝍠 아래의 내용은 윤기향 선생이 번역하고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에서 출간한 보라기네의 야코부스의 《황금전설》을 대본으로 하였다.

동정녀 아가다

AD 253년 로마의 데키우스 황제 때의 일이다.1) 동정녀 아가다(Agatha)는 시칠리아 카타니아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굉장한 미인이었지만 늘 경건하게 기도하며 살았다. 아가다라는 이름은 ‘거룩하다’는 뜻을 갖는 아기오스(agios)에서 유래하였다. 혹은 ‘노예’란 의미의 아가트(agath)와 ‘고귀한’이란 뜻의 다아스(thaas)의 합성어로 고귀한 분의 노예, 즉 그리스도의 노예란 의미이다.

▲ 카타니아의 성녀 아가다. 가슴이 절단되고, 감옥에서 한 노인에 의해 회복된 모습을 그렸다.
이런 고결한 아가다를 당시 시칠리아 총독 퀸티아누스가 탐했다. 그는 호색한이며 천한 사람이었다. 온갖 유혹과 협박에도 아가다가 굴복하지 않자 퀸티아누스가 말했다. “그리스도를 맹세코 부인하든가 아니면 신들을 경배하라.” 그녀가 거절하자 그녀를 고문대에 대(大)자로 눕혀 놓고 고문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아가다는 말했다. “이러한 고통들은 나의 기쁨입니다. 마치 내가 좋은 소식을 듣고 있는 것 같으며, 내가 오랫동안 애타게 보고 싶어 하던 그 어떤 분을 보고 있으며, 위대한 보물들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밀이 도리깨질을 통하여 겨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으면 헛간에 저장될 수 없듯이, 내 영혼 역시 당신이 참수인으로 하여금 내 몸을 가혹하게 다루도록 하지 않는 한 절대로 낙원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말이 퀸티아누스를 더욱 화나게 했다. 그는 사형 집행인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그녀의 젖가슴을 비틀어 짜게 한 다음에 젖가슴을 절단하라고 명령했다. 아가다는 말했다. “사악하고, 잔인하며, 야수 같은 압제자여! 그대의 어머니 역시 이것으로 그대에게 젖을 먹였건만 여인의 몸을 이렇게 절단하고도 부끄럽지 않는가? 그러나 내 영혼 속에는 어린 시절부터 주님께 봉헌하며, 내 온 정신을 키워준,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상처도 입힐 수 없는 가슴이 있다.” 아가다는 가슴이 도려진 채 감옥에 갇혔다. 한밤중에 한 노인이 나타나 아가다의 가슴을 말로 완치시켜주었다.

4일 후 퀸티아누스는 아가다를 다시 끌어내었다. 아가다는 발가벗겨지고, 땅바닥에 깔아놓은 날카로운 질그릇 조각과 불길이 살아있는 역청탄 위로 굴려졌다. 그러자 엄청난 지진이 도시를 흔들었다. 궁전이 무너지고, 퀸티아누스의 두 참모가 압사 당했다. 아가다는 다시 감옥에 갇혔다. 그녀는 마지막 기도를 하고 순교하였다.

한 비단옷을 입은 젊은이가 백여 명의 값비싼 하얀 예복을 입은 잘생긴 청년들을 거느리고 나타나 죽은 아가다의 머리맡에 명판을 놓고 사라졌다. 명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거룩하고, 관대한 영혼의 소유자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고, 조국의 해방을 이루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라는 이름은 ‘지극히 높은 곳에 있는 도시’, ‘지복(至福)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그 도시를 획득하고 소유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소유하려면 5배의 대가,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한 빈곤, 희락을 위한 고통, 안식을 위한 수고, 영광을 위한 불명예, 그리고 생명을 위한 죽음을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또 이 단어는 바스툼(bastum), 즉 안장이라는 말에서 유래하는데, 그리스도가 승마자라면 교회는 말이고 세바스티아누스는 그 안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올라타시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승리를 얻는데 썼던 안장인 것이다.

세바스티아누스는 밀라노 시민으로 로마군 보병대의 사령관이었다. 때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 때였다. 세바스티아누스는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수비대 대장을 거쳐 황제의 개인 수행원으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그가 군인이 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고문 받는 기독교인들을 찾아가 그들의 의지가 약해질 때 그들을 격려할 목적이었다.

마르켈리누스와 마르쿠스라는 귀족가문의 쌍둥이 형제가 기독교 신앙 때문에 참수형 선고를 받게 될 때였다. 이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어머니가 와서 머리를 풀고 옷을 찢어 가슴을 풀어헤치며 울부짖었다. “오! 사랑하는 아들들아! 들어보지도 못한 비참함과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나를 에워싸는구나! 기꺼이 죽음을 자처하니 내가 아들을 잃는구나! …… 자식을 잃고 불쌍한 노년의 세월을 억지로 살아가야 하는가.”

아버지가 머리에 재를 뿌리고, 노예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착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나를 위해 준비해 놓은 장례식을 내 아들들을 위해 치르게 되다니, 내 불행이여! 오! 내 아들들아! 노년의 지팡이요, 내 허리의 두 열매인 너희들은 어찌 그리도 죽음을 사모하느냐? …… 눈물로 내 눈을 멀게 해다오! 참수형을 받아 칼 아래 내 아들들이 쓰러지는 것을 내가 보지 못하도록!”

다음에는 두 아들의 부인들이 그들 앞에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당신들은 우리들을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 이 어린 것들을 누가 인도합니까? …… 당신들은 철심장을 가졌습니다. 아! 당신들은 부모들을 멸시하고, 친구들을 걷어차고, 부인들을 버리고, 자식들을 유기하고, 자신의 몸을 사형 집행인들에게 넘겨주었군요!”

이 모든 것들이 두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에 그곳에 있던 세바스티아누스가 모인 무리들을 비집고 뛰어들며 말했다. “오! 그리스도의 강한 군사여! 눈물 섞인 감언들이 너희들로 하여금 영원한 면류관을 저버리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는 그들의 부모들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그들은 먼저 하늘나라로 가서 당신들을 위해 별 같이 빛나는 처소를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인생은 천국에 소망을 둔 사람들을 배반해 왔으며, 그들의 기대를 속여 왔습니다. …… 그러므로 순교에 대한 우리의 갈망과 사모함을 더욱더 북돋웁시다.” 마침내 쌍둥이 형제는 순교하고 이들의 부모와 가족들은 모두 세례를 받았다.

▲ 안드레아 만테냐, 성 세바스티아누스[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제작]
쌍둥이 형제의 순교를 담당했던 간수장과 그의 아내 조예(Zoe) 또한 세례를 받았는데, 후에 조예는 이교도에 붙잡혀서 오랫동안 고문에 시달리다가 순교했다. 이 사실을 안 쌍둥이 형제의 아버지 트란퀼리누스는 몹시 흥분하였다. “이 여인이 우리보다 앞서 승리의 면류관을 얻었도다! 우리가 더 살아야하는가!” 그리고 며칠 후 그는 돌에 맞아 죽었다.

마르켈리누스 형제의 참수형을 집행한 행정관이 세바스티아누스를 고발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세바스티아누스를 소환하여 그의 증언을 들었다. 황제는 그를 막사 중앙에 있는 기둥에 묶고 모든 화살을 쏘라고 명령했다. 세바스티아누스는 고슴도치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났다. 황제는 그를 곤장으로 때리고 하수구에 그의 시신을 던지라고 명령하였다. 다음날 그는 성 루시나에게 나타나 자기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며, 사도들의 유골 가까이에 묻어달라고 부탁하였다. AD 287년경의 일이다.

동정녀 아그네스

아그네스(Agnes)란 말은 ‘경건하다’는 뜻을 갖는 아그노스(agnos)에 유래한다. 암브로시우스에 의하면 그녀는 13살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비록 나이 어린 아이임에도 영적으로 매우 성숙하였다고 한다.

어느 날 행정관의 아들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져 청혼하였다. 그녀는 냉정하게 거절하며 말했다. “내 앞에서 사라져요! 그대는 죄악의 불꽃을 일으키는 자이며, 사악함의 연료요, 죽음을 주는 음식이예요! 나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과 언약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유혹도, 어떤 약속도, 아그네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했다. “그분이 바로 내 오른손에 결혼반지를 끼워 주셨으며, 내 목에 귀한 보석목걸이를 걸어 주셨으며, 금과 보석으로 섞어 짠 옷을 입혀 주셨으며, 이마에는 그분 외에는 어느 연인도 어떻게 할 수 없도록 보호해 주는 표시를 해놓으셨으며, 그분의 피는 나의 뺨을 물들였습니다. 이미 그분의 순결한 포옹이 나를 껴안았으며, 그분과 나는 연합되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비교할 수 없는 보물들을 내게 보여주시며, 내가 진정으로 그분 안에 머문다면 그 모든 것을 나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행정관은 아그네스를 발가벗겨 매음굴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녀의 머리를 길게 자라게 하셔서 어떤 옷보다도 더 좋게 그녀의 몸을 가리게 해 주었다. 행정관의 아들이 친구들과 함께 그녀를 능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불가사의한 빛에 친구들은 도망가고 행정관의 아들은 사탄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

아그네스는 이글거리는 불속에 던져졌다, 그러나 불길이 갈라지면서 조금도 다치게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참수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인 AD 309년에 일어난 일로 추정된다. 암브로시우스는 《동정녀들에 대해서》라는 책에서 아그네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남녀노소 모두 그녀를 노래한다. …… 그녀가 사람에 대해 한 말은 믿지 않을지라도 그녀가 하나님에 대해 하는 말은 믿어졌다. 이는 초자연적인 것은 자연 법칙을 뛰어넘어 천지 만물의 주인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종류의 순교였다.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자만이 승리를 얻을 준비가 된 사람이며, 싸울 준비가 안 된 사람은 결코 면류관을 얻을 수 없다. 심판의 때가 도래하기 전에 덕성을 닦은 자여! 혼례의 방으로 서둘러 가지 않고, 동정녀로서 고문의 장소로 행진한 신부여! 기쁨에 찬 그녀의 도착이여, 신속한 발걸음이여!”

성녀 아가다, 성 세바스티아누스, 동정녀 아그네스. 이들은 모두 혹독한 고문을 축복으로 여겼다. 이들은 극심한 고통을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최고의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2. 더러운 이름, 사디즘

이로부터 대략 1500여 년이 흐른 18세기 후반. 파리는 여전히 대혁명의 열기가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열기가 고조될수록 단두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칼날을 떨어뜨렸다. 파리 광장은 참수된 시체에서 흘리는 피로 늘 젖어 있었다.

“냉큼 이년을 홀딱 벗겨서 배를 나무둥치에 대고 꽁꽁 묶어. 이년이 응당 받아야할 벌을 내가 직접 가하겠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즉각 시행되었습니다. 손수건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더니 나무를 꼭 껴안으라고 하였습니다. 팔과 다리를 나무에 묶고……채찍을 가하기 전에 그 잔인한 자는 저의 반응을 관찰하고 싶어 했습니다. 저의 눈물과 제 얼굴에 나타나는 고통이나 두려움의 성격을 조용히 음미하려는 듯하였습니다.
……
잔디 위의 낭자한 피를 보고서야 제가 어떠한 지경에 처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이 더러운 년아. 미덕의 대가가 좀 비싸다는 것을 깨달았어?”
정열의 광증 뒤에 오는 일종의 혐오감 어린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며 그가 말하였습니다.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의 소설 《미덕의 불운》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이 소설은 아름답고 착한 여인 쥐스틴이 견디기 힘든 고통과 불행을 겪는 이야기이다. 남자들은 여인에게 고통을 가하며 쾌락을 느낀다. 가학적 변태성욕을 뜻하는 사디즘(sadism)이란 단어는 사드 후작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3. 고통이 쾌락이면 순교는 광기이다

《황금전설》에서 고문을 가하는 압제자들은 로마의 고관이거나 이교도들이다. 그리고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사드의 소설에선 성직자들이 고문을 가한다. 착한 여인 쥐스틴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온갖 고문을 가한 자들은 수도원장과 그의 일당이었다. 어쩌면 이 점이 사드를 부도덕한 변태성욕자로 낙인찍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감히 성직을 모욕한 죄. 그런 이유로 살아서는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죽어서는 더러운 이름의 대명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책은 모조리 수거되어 불태워졌다.

고통과 쾌락의 상관계수는 어느 정도일까? 《황금전설》을 보면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문을 고통이 아닌 쾌락으로 여긴다.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을 느낀다. 만약 도착(倒錯, perversion)을 말한다면, 이걸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드의 소설에 나타나는 변태와 광기가 《황금전설》에 더욱 풍부하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하나? 아가다의 젖가슴을 쇠젓가락으로 절단하는 자들이 사악하고 잔인한 압제자들일까? 아니면 그런 고통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도록 어린 소녀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자들이 잔인하고 사악한 자들일까? 서로 먼저 고문당하고 참수되겠다고 앞을 다투는 모습이야말로 광기 중의 광기 아닌가? 고통을 쾌락이라고 한다면 순교야말로 광기 아닌가?

사드의 소설에서 고통 받는 주인공은 고통으로 괴로워한다. 쾌락은 온전히 고통을 가하는 자의 몫이다. 사드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전설이든 소설이든 그냥 허구라고 말한다면 ..... 진실과 허구 사이는 얼마나 먼 걸까?

고통을 고통이라고 말한다면 진실이다.
고통을 쾌락이라고 말한다면 포르노다.

주) -----
1) 데키우스 황제의 재위는 AD 249~251으로 《황금전설》과는 차이가 있다.

김문갑 | 철학박사, 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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