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이란 우리 중생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번뇌와 집착 근심 걱정이 사라진 청정한 경지, 지혜를 닦고 수행을 쌓아서 완성되는 깨달음의 세계라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니르와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라고 한다. 생사의 번뇌로부터 떠나 있어서 지극히 고요하고 청정하고 안락한 곳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연히 니르와나를 인터넷 검색창에 쳤더니 수많은 동남아시아 리조트가 니르와나라는 말을 점령하고 있었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일상의 근심 걱정을 떠나 심신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해 주는 휴양지 리조트 이름으로 이러한 이미지와 딱 떨어지는 ‘니르와나’를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말을 찾아 사용한 것은 고맙지만 너무 상업적으로 흐른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기도 하다. 다만 그 좋은 뜻이 반감되지 않도록 부처님의 안락 법문 한 구절쯤은 그곳에 새겨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한다.

《대열반경》 <사자후보살품>에는 이 대열반에 들어가는 원인과 대열반의 과(果)에 대해서 논하는 법문이 있다.

첫째, 열반에는 인(因)이 없다는 주장이다. 보살이 계행을 지니어 닦아서 후회하지 않는 과(果)를 얻고, 해탈을 이루어 열반의 과(果)를 얻는다면 계행은 인(因)이 없고 열반에 과(果)가 없다고 한다. 보살이 보살도를 통하여 인행을 닦는데 계·정·해를 실천해서 아직 완전히 해탈을 이루지 못했을 때를 인행이라 하고 인위(因位)라 한다. 이에 비해 마침내 해탈을 이루어 열반에 이르면 부처가 되니 과(果)를 얻는다. 이와 같이 열반에는 생사고해가 없으므로 후회 없는 과가 이루어지니 인행으로서의 계행이 없고 계행의 과도 없게 된다. 만일 열반에 계행의 인이 없다면 항상하다[常]고 할 수 있고, 열반에 인(因)이 있다면 무상하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열반이 본래 없다가 지금 있다고 한다면 이는 무상한 것이 된다. 열반이 무상하다면 열반을 뜻하는 나머지 락(樂)·아(我)·정(淨)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열반에 잘 들어가려면 인행을 잘 닦아야 한다. 경에서는 열반에 들어가는 인행으로 계행부터 닦는데, 계행을 잘 닦는 데에도 원인이 있으니 바른 법을 잘 듣는 것이라 한다. 또한 바른 법에도 원인이 있으니 선지식을 가까이 함이라 한다. 선지식을 가까이 함에도 원인이 있으니 신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심에도 원인이 있으니 첫째는 법을 잘 들음이요, 둘째는 뜻을 잘 생각함이라 한다. 그리고 믿는 마음은 법문을 잘 듣는 것이 원인이고, 법문 잘 듣는 것은 올바로 믿는 마음을 원인으로 한다는 것이다.

열반에 들어가는 계·정·혜를 닦는 데 있어서 바른 계행은 법을 잘 듣는 데 있고, 법을 잘 듣는 것은 선지식을 가까이 하여야 하고, 선지식을 가까이 함은 바른 신심에서 나오고, 바른 신심은 법을 잘 듣고 뜻을 잘 생각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열반이라고 하는가.

열반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으뜸가는 과〔上果〕이기 때문이고, 생사의 괴로움을 다 끊었으며, 생사를 초래하는 번뇌를 다 깨트려 더 이상 파할 것이 없으므로 과라 한다. 또 모든 번뇌에 의해서 가책을 받으므로 열반을 과라 하며, 번뇌를 허물의 허물이라 이름한다. 이 열반은 생멸이 없기 때문이며, 생사의 업을 지음이 없기 때문이며, 유위(有爲)가 아니기 때문이고, 무위(無爲)의 법이기 때문이며, 항상 변하지 않기 때문이고, 처소가 없기 때문이고, 처음과 나중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끊을 원인이 있다면 열반이라 할 수 없다. 곧 반(槃)은 원인〔因〕이란 말이고, 열반이란 없다〔無〕는 뜻으로 인이 없으므로 열반이라 한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총체적으로 여섯 가지 뜻〔六義〕이 없으므로 열반이라고 한다고 했다. 첫째, 필경에도 없기 때문이니 일체 법에는 나라는 실체가 없고, 나에 속한 것〔我所〕도 없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때에는 없기 때문이니 가루었을 때 물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셋째, 적기 때문이니 열반에 도달한 자는 극히 적어서 마치 음식에 간이 적은 것을 간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넷째, 받지 않아서 없음이니 전다라 바라문의 법을 받아 가지지 않음과 같기 때문이다. 다섯째, 나쁜 법을 받은 것이 없음이니, 사문이나 바라문법을 받은 자가 없기 때문이다. 여섯째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한다. 곧 희지 않은 것을 검다고 하고 밝음이 없는 것을 무명이라 함과 같이 세상법에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법은 아가 없고 열반은 인이 없지만 그 자체는 과이고 상·락·아·정이라 한다.

둘째, 다음으로 열반에 인(因)이 있다는 주장이다. 아직 인(因)이고 과(果)가 아닌 것을 불성이라 한다. 불성은 인으로 생긴 것이 아니므로 인이고 구경의 과가 아니기에 과가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인(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요인(了因)이고 다른 하나는 생인(生因)이다. 능히 법을 내는 것을 생인이라 하는데 마치 등불이 비치면 물체가 나오는 것과 같다. 요인이란 아는 인이니 불성이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말한다. 또 생인은 믿는 마음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말하고, 요인은 팔정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또한 불성에는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해탈을 이룬 세존의 모습으로 눈으로 보기도 하고 소리를 들어서 본다고도 한다. 이에 비해 중생들은 눈으로 볼 수 없으나 십주보살과 부처님은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부처의 몸은 두 가지로 무상한 몸이니 이는 볼 수 있는 것이고, 영원한 몸은 여래 세존의 해탈한 몸으로 보이지 않는 몸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몸이 있는 것은 모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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