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7년(신라 효소왕 6년) 망덕사(望德寺) 완공

사천왕사 보호 위해 창건한 호국사찰

▲ 경주 망덕사지. <사진=경주시관광자원영상이미지>
망덕사는 호국사찰인 사천왕사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신라는 외세 즉, 당을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한다. 하지만 당은 신라마저 복속하려고 문무왕 19년(679) 50만 대군을 일으켜 침략해 온다. 의상 스님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문무왕은 명랑 스님의 건의를 받아들여 불력(佛力)으로 당군을 물리치기 위해 사천왕사를 창건한다. 명랑 스님은 사천왕사에서 문두루 비법으로 연거푸 두 번 당군을 물리친다. 이 사실이 당에 알려지자 신라는 “사천왕사는 당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신라의 해명을 믿지 않은 당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고, 신라는 사천왕사 인근에 새 절을 지어 당 사신을 안내한다. 이 절이 바로 망덕사다.

절을 급하게 지은 탓인지 효소왕은 즉위 첫 해(692)에 망덕사를 정식으로 짓기 시작해 5년 만에 완공한다.

《삼국유사》 ‘진신수공(眞身受供)’ 조에는 망덕사 낙성회 때 효소왕의 일화가 전한다. 초라한 비구 모습으로 나타나 재에 참석을 청한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한 효소왕이 진신석가가 살고 있었다는 비파암 밑에 석가사를, 진신석가가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각각 창건했다는 것이다.

또 ‘선율환생(善律還生)’ 조에는 따르면 망덕사는 명부(冥府)에 갔다가 600부 《반야경》을 완성하기 위해 환생한 선율(善律) 스님이 주석한 절이기도 하다.

■ 817년(신라 헌덕왕 9년) 수철(秀澈) 스님 태어남

첫 구산선문 실상산문의 2세 조사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수철 스님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장 먼저 문을 연 실상산문(實相山門)의 2조이다.

연허(緣虛) 율사에게 출가한 스님은 복천사에서 비구계를 받은 후 설악산에서 실상산문의 개산조 홍척 국사를 만나 법을 이었다. 홍척 국사는 도의 스님과 함께 ‘북악 도의 남악 홍척〔北岳義 南岳陟〕’으로 불린 당대를 대표하는 선승이었다.

수철 스님은 경문왕 7년(867)에 왕을 위하여 선(禪)과 교(敎)의 다름과 같음에 대해 대답했으며, 스님을 존경한 헌강왕의 요청에 따라 실상사에서 멀지 않은 심원사(深源寺)에 주석했다. 진성왕 7년(893) 스님이 입적하자 진성왕은 ‘수철(秀澈)’이라는 시호와 ‘능가보월(楞伽寶月)’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실상사에는 지금도 스님의 부도와 탑비가 남아있다. 

■ 937년(고려 태조 20) 작갑사에 ‘운문사(雲門寺)’ 사액

후삼국 통일 도운 보양 스님에 답례

▲ 청도 운문사 대웅전. <사진=문화재청>
운문사의 원래 이름은 대작갑사(大鵲岬寺)다. 진흥왕 21년(560) 한 신승(神僧)이 가슬갑사(嘉瑟岬寺), 천문갑사(天門岬寺), 대비갑사(大悲岬寺), 소보갑사(所寶岬寺)와 함께 창건했다. 가슬갑사에서 귀산(貴山)·추항(箒項)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설한 원광 법사가 대작갑사를 중건했다.

대작갑사의 이름이 ‘운문사’로 바뀐 것은 고려 태조 때의 일이다. 당시 보양(寶壤) 스님이 주석하며 이 절을 중창했는데, 후삼국을 통일할 때 스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태조가 쌀 50석을 하사하고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것이다.

운문사는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이 주석한 사찰이기도 하다. 《삼국유사》는 역사, 지리, 문학, 종교, 언어, 민속, 사상, 미술, 고고학 등 우리 민족의 고대 문화를 알 수 있는 보고(寶庫)다. 일연 스님은 왕명으로 운문사에 주석한 충렬왕 3년(1277) 무렵부터 《삼국유사》 집필해 인각사에서 마무리했다고 한다. 

■ 1237년(고려 고종 24) 이규보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 君臣祈告文)’ 지음

고려가 재조대장경 조성한 이유 밝혀

▲ 해인사 고려대장경 경판
고려가 국가 차원에서 고려대장경을 판각한 것은 부처님의 힘으로 몽고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서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경을 판각할 때 군신의 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은 그 사정을 기록한 글이다. <대장경을 판각할 때 군신의 기고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옛적 거란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오자 … 현종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세워 대장경 판본을 판각해 이루었습니다. 그러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렇다면 대장경도 한 가지고 전후 판각한 것도 한 가지고 군신이 함께 서원한 것도 한 가지인데 어찌 … 지금의 달단(몽고)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규보가 <대장경을 판각할 때 군신의 기고문>을 지은 고려고종 24년은 고려대장경을 처음 새긴 해이기도 하다. 고려는 이 해에 경전 2종 115권을 판각한 것을 시작으로 고종 35년(1248) 대장목록까지 12년 동안 경전 1,496종 6,561권을 7만 8,500여 장의 목판에 새겼다.

고려대장경은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물론 북송의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과 거란대장경(契丹大藏經) 등을 저본으로 조성됐다. 개태사에 주석하고 있던 승통(僧統) 수기(守其) 스님이 이들 대장경을 면밀히 대조․교정해 본문의 잘못을 바로잡고 탈락한 것과 부족한 것을 보완했다. 또한 한역하면서 뜻에 큰 차이가 있는 경은 삭제하거나 다른 번역본으로 대체했으며, 초조대장경에 없는 경전은 새로 편입시켰다. 고려대장경은 세계적으로 불교 연구의 기본서 사용되는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의 저본이기도 하다. 

■ 1477년(조선 성종 8) 새로 절 짓는 것을 금함
■ 1537년(조선 중종 32) 새로 지은 도성 안 절을 헒

불교 명맥 끊긴 한국불교사 최대 암흑기

▲ 서울 원각사지(탑골공원) <사진=문화재청>
조선 성종에서 중종에 이르는 시기는 한국불교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암흑기였다. 성종은 즉위 6년(1475)에 성 내외 비구니 사찰 23개소를 헐어버렸고, 즉위 8년(1477)에는 절을 새로 세우는 것을 일체 금지했다. 또 즉위 24년(1493)에는 승려가 되는 것을 금했다.

연산군은 삼각산 각 사암을 폐하고 사찰 토지를 몰수했으며, 성내 비구니들을 궁중의 종이나 관노로 삼는 등 불교를 유린했다. 특히 즉위 10년(1504)에는 조선 태종이 종단을 통·폐합해 7개 종단을 만들었을 때 조계종의 본사이자 세조대와 성종대 왕실 원찰이었던 원각사를 기방과 유흥 장소로 삼았다.

연산군을 축출하고 즉위한 중종은 역대 왕 중 가장 철저하게 척불을 단행했다. 중종은 아예 일반인들이 출가할 수 없도록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서 ‘도승(度僧)’ 조를 삭제하고 승과를 폐지하기까지 했다. 불상과 종을 녹여 무기를 만들었으며, 사찰 토지는 향교에 귀속시켰다. 즉위 4년(1509)에는 한양의 사찰을 모두 폐하여 공관으로 사용하였고, 즉위 7년(1512)에는 원각사를 철거해 목재를 다른 곳에 쓰게 했다. 즉위 32년(1537)에는 도성 안의 무가(巫家)와 새로운 절을 헐어버렸다.

이런 일련의 조치로 세종 이후 선․교 양종으로 전승돼 오던 불교는 선종과 교종의 명맥까지 훼철되는 수난을 겪게 됐다. 

■ 1897년(조선 고종 34년) 정토진종 광주·목포에 포교소 설립

일 대외침략·일본불교 활로 모색 일환

▲ 일본식 사찰인 군산 동국사.
일본불교의 조선 진출은 일본의 대외침략 정책의 일환이자, 메이지 유신 이후 폐불훼석(廢佛毁釋)의 수난을 당하던 일본불교가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시도한 활로 찾기이다.

메이지 정부를 건설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에도 신페이(江藤新平)는 1870년에 일본불교를 대외정책에 활용하자는 의견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후 메이지 정부의 독려로 일본불교의 조선 진출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고종 14년(1877)에 정토진종 대곡파 동본원사파가 오쿠무라 엔싱(奧村圓心)과 히라노 게이스이(平野惠粹)를 파견해 부산에 동본원사 별원을 설립했다. 4년 뒤(1881)에는 일련종(日蓮宗)의 와타나베 이치웅(渡邊日運)이 포교소를 설립했고, 쿄토(京都) 묘각사 주지 아사히 미츠(旭日苗)도 부산에서 ‘일종해외선교회’를 조직했다.

고종 32년(1895)에는 일련종 관장 대리 자격으로 조선에 온 사노 젠레이(佐野前勵)가 대원군 등 고위 관리들을 만나 조선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해제를 건의한다. 사노의 건의는 일련종 포교를 위한 것이었다.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의 《이조불교(李朝佛敎)》에 따르면 사노는 승려 도성 출입 금지를 해제 시키면 조선 승려들을 일련종으로 쉽게 개종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고종은 이 해 ‘승려들의 입성 금지령을 완화해 달라’는 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박영효의 청을 받아들인다.

고종 34년(1897)에는 일본 정토종이 서울에 개교원(開敎院)을 설치하였고, 오쿠무라 엔싱 등도 광주포교소와 목포별원을 창건했다. 또 조동종은 서울에 일한선사(日韓禪寺)를 창건하기도 했다.

공격적으로 조선 진출에 나선 일본불교는 1911년까지 진종, 정토종, 일련종, 조동종, 진언종, 임제종 등 6개 종파가 전국에 별원과 포교소 167개소를 개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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