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노략질 빈번 고려·조선시대 공도정책 써
나물왕 4대손 이사부, 박이종·이질부로도 불려


지철로왕이 배필을 구한 사실을 전한 《삼국유사》는 후대 사람들이 지철로왕 즉, 지증왕을 오해할 것 같아서 한 가지 위업을 남기기로 결정했다. 바로 울릉도 이야기다.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로 추정되는 아슬라주(阿瑟羅州)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금(여기서 지금은 고려 후기?)의 명주(溟州)의 동쪽 바다 즉, 동해 가운데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지금은 우릉(羽陵)이라 불리는 울릉도(亐陵島)가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없지만 울릉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13년’ 조에 신라에 복속된 사실이 전한다. 이미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통해서 우리 국민이라면 대부분 아는 사실이 된 이 사실을 당시 즉, 고려 후기나 조선 전기의 사람은 알기 어려웠다. 국정홍보처가 당시에는 제대로 기능을 못해서 그런 것인지 교육부가 대국민 계몽을 잘못해서 그런 것인지 울릉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알 정도면 거의 석학이라는 말을 들었을 시대였다. 그래서 일연 스님인지 누군지 모르겠지만 《삼국유사》의 저자는 울릉도에 대한 진실 하나를 ‘지철로왕’ 조에 편입시켜 전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여하튼 지금도 가보기 힘든 섬이 울릉도인데 신라시대는 어땠을까? 아무도 가고 싶지 않은 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섬이 강릉이나 삼척 부근에서 바라보면 가끔 보이는 데 있다. 보이는 섬이어서 그런지 뱃사람들은 동해로 나갈수록 보다 지근거리에서 이 섬 울릉도를 볼 수 있었다. 견물생심이라고, 물건을 봤으니 마음이 안 생길 리 없다. 특히 지금이나 그때나 위정자들은 땅 따먹기에 관심이 지대했다. 그러니 배가 생기고 거기까지 갈 여력이 있는데 가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신라시대에도 가본 것은 아닐까? 깃발 꽂기 위해서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울릉도를 우리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도에서도 울릉도가 보인다. 그리고 일본의 시마네 현에서 한참 떨어진 오키시마 근해에서도 독도는 보인다. 그러니 일본에서 오키시마를 갔다가 독도를 보고 울릉도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 북쪽에 있는 러시아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특히 해적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천혜의 요지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면 해적의 노략질을 받는 곳이 되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일시적으로 공도정책을 써서 이곳 주민을 육지로 옮기기도 했다. 말은 국민보호이겠지만 어쩌면 국민의 해적화를 막기 위한 방책이 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오랫동안 우리의 울릉도는 빈 섬이 되기도 하였다.

울릉도의 둘레가 2만 6,730보였는데 섬사람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했다. ‘약오르지롱! 쫓아와 봐라’라고 이야기해도 쫓는 것이 어려우니 당연히 교만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신라가 아무리 협박해도 울릉도 섬사람들은 신하되기를 거부하였다. 왕은 신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관등인 이찬(伊飡) 박이종(朴伊宗)을 불렀다.

박이종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국민 다 아는 사람인 이사부(異斯夫)를 가리킨다. 다만, 《삼국사기》 ‘이사부’ 조에는 그의 성이 박 씨가 아니라 김 씨로 기록되어 있다. 양자로 나중에 데려갔거나 어머니가 박 씨거나 했나 보다. 신라시대에 성씨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 같다. 박 씨나 김 씨의 경우에는 그게 그것 같다. 황금의 김 씨나 밝은 박 씨나 다 같은 의미여서 그런가? 여하튼 이사부는 나물왕의 4대손으로 태종(苔宗)이라고도 하고 단양적성비에는 ‘이사부(伊史夫)’, 《일본서기》에는 ‘이질부(伊叱夫)’로 등장한다.

이사부는 지증왕 5년(505)에 실직주 설치 후 군주로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512년에 드디어 우산국을 정복한다. 처음부터 우산국을 정복하기 위해 군주로 임명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해상세력화 된 울릉도가 눈엣가시가 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지증왕은 이들을 때려잡아서 군기를 세우고 싶었다. 늙은 왕이 68세가 되어 이사부를 실직군주로 삼은 것도 그런 체면 차리기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배도 만들어야 하고 훈련도 시켜야 하고 애초부터 기병이나 보병을 훈련시켜서 수병으로 만드는 데 7년이나 걸린 이유다. 그러고 보면 이사부는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잘했을 수도 있다. 원래 그런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전하지 않은 걸 보면 그리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나 보다. 여하튼 이 조목의 주인공은 지증왕이니 조연으로도 충분하고 조연에게 그리 많은 지면을 할애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울릉도를 복속시킨 이사부는 진흥왕 2년(541)에 병부령으로 승진했고 545년에는 이찬으로 국사의 편찬을 건의했다. 아마도 자신의 울릉도 복속을 크게 다루려고 했던 심산이 있었나 보다. 여하튼 그 시도는 성공을 거뒀고 우리는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울릉도 하면 이사부를 떠올리게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웬만한 신라왕보다 더 유명해진 사람인 것은 틀림이 없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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