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불교적 의미는 첫째 공양(燈供養, 육법공양의 하나)입니다. 초파일에 사찰에 연등을 다는 것, 불보살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지요. 둘째 의미는 무명(無明)을 타파하고 반야(般若)를 상징합니다. 어둠을 몰아내고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핵심이고 상징입니다. 비로자나불은 대일여래(大日如來)라 해서 태양과 같은 빛을, 아미타불은 무량광(無量光)을 뜻합니다. 그래서 불보살은 경전마다 빛과 원광(圓光)으로 화현합니다. 마지막 셋째 의미는 간절함과 발원입니다. 기도나 의례시 촛불은 빠지지 않습니다. 간절함과 발원이 담겨 있으며 어렵고 어두운 현실에서도 우리의 발원이 빛이 되어 꺼지지 않고 불보살께 전달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토요일마다 광장에서 전 국민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촛불을 드는 것은 불보살이 운집해 있는 화엄법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촛불의 세가지 의미를 다 구족하고도 남습니다. 이것이 진짜 비로자나 화엄진법회(毘盧遮那 華嚴眞法會)가 펼쳐지고 있는 현장입니다. 저는 <화엄경>, <법화경>에 나오는 법회의 모습을 이제 이런 모습으로 상상할 것입니다.

조선 500여년의 역사에서 성군이라 손꼽히는 왕은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입니다. 태조, 태종, 세종, 성종, 영조, 정조 등 이들 왕의 치세기간은 대략 100여년 정도이며 조선역사 전체를 따져 보면 25%에 불과한 짧은 시간입니다. 그 외 나머지 왕들은 그저 그런 임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긴 시간 동안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무능하여도 훌륭한 신하들과 정직하고 이름 없는 백성들이 움직였고, 건국 초기에 갖추었던 기본 시스템에 크게 엇나가지 않는 한(물론 백성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만) 어느 정도는 나라를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스템마저 뒤엎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추구했던 왕들은 가차 없이 반정에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연산군이지요. 성리학의 유교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에서 전제군주로 군림하며 자기 마음대로 하려다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지요.

국가 시스템의 부재와 더불어 사익 추구를 목적으로 국가권력을 움직이는 권력층의 부패는 망국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벌써 한 달이 넘게 추운 거리에서 현 정권 퇴진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제는 응답해야만 합니다.

수개월째 경제를 비롯한 거의 모든 국가운영 정책은 실종되었으며, 경제와 민생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는다던 높으신 분들은 정작 본인들의 부패와 무능으로 국가경제와 시민의 삶이 엉망이 된 것도 모자라 정서까지 피폐해져 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본인들 자리보전을 위해 버티기로 일관하며 국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모습들이 위선과 기만이었다고, 여태껏 속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 배신감이 역대 최저의 지지율로 반영되었고 아마 그 수치의 반등은 앞으로 없을 것입니다.

종단이 그동안 보여 주었던 모습도 이와 비슷합니다. 신도들이 침묵하고 모른 척한다고 해서 그동안 저지른 전횡과 부패의 역사가 잊히리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분명 언젠가는 전체 신도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알아차리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매주 광화문에는 별처럼 수많은 사람이 모이고 있습니다. 중생의 아픔과 국가적 위기의 타개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거창한 문구가 아니더라도 스님들과 종단은 출가의 정신을 현실에서 펼칠 수 있는 때를 현실에서 만났고 그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방과 절, 그리고 관념속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상처받은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길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획기적인 포교를 원하십니까? 그럼 광장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고통 받고 상처받은 국민들의 함성과 분노를 어루만지고 녹여 주십시오.

기괴한 정체불명의 국제 간화선법회, 비불교적이고 이익단체와 유사한 모습의 봉은사부지 환수를 위한 망천도재와 삼보일배, 신도를 동원한 시청 앞 대규모 시위를 능가하는, 종단차원의 실천을 통해 살아있는 불교를 보여 주십시오. 연유야 어찌 되었건 봉은사 땅 찾기(종단은 강탈이라 주장하는)에는 종단이 앞장서서 거리로 나서더니(이익에는 밝음) 정작 국가의 명운이 달린 문제에는 어찌 이리 무관심합니까?

야단법석, 팔관회와 연등제 등 주의를 환기시키고 국민의 상처를 위로할 수 있는 좋은 전통이 불교에 있지 않습니까? 좋은 불교전통을 재해석하고 시민들의 마음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중생과 동체대비 할 수 있는 기회가 매주 광장에서 펼쳐집니다. 그곳에서 함께 박수치고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종단차원의 성명서 하나 나오지 않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아직도 꿈속을 헤매며 줄을 타려는 기회주의적 모습으로 보입니다.정말 우리 불교가 대승을 표방하고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원력을 지녔다면 현실에서 오온(五蘊)과 중생을 등지고는 불가능함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 위기는 외침(外侵)이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났습니다. 권력의 부조리, 부정부패 그리고 위선과 기만이 그것입니다. 호국불교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한다면 선방에서 법당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지금 국민들과 함께 해야만 합니다. 나라와 국민 없이 불교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호국불교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권력에 유착해 좋은 시절 보내지 않았나요? 이제 그 연결 관계가 어려워지니 갑자기 중립을 이야기하고 종교와 정치가 별개라고 주장하고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 침묵하는 태도는 더 큰 위선입니다.

그동안 종단이 내세웠던 화쟁위원회가 이름 그대로 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가장 크게 화쟁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화쟁위원회의 역할과 메세지를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이야말로 실력을 보여줄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100인 사부대중공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요? 국가의 위기에 종단과 불교가 국민을 위해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적어도 고민하고 논의하고 방법을 제시하여야 합니다.

종단의 위신 높으신 선사들과 총무원 스님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사태에 침묵으로만 일관 하실 겁니까? 결국엔 국민들과 신도들에게 외면 당하고 쇠락의 길을 가고 싶지 않다면 최소한의 성명서나 할과 방을 날리십시오.

<열반경>에 이르길 대중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파계하는 잡승(雜僧), 둘째는 우치승(愚癡僧) 즉 어리석은 중, 셋째는 청정승(淸淨僧)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밥을 먹기 위해 출가한 이나 계를 파하고 참회하지 않고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는 이를 머리 깎은 거사라고 하였습니다.

칼과 작대기를 가지더라도 계행을 가진 이가 법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이도 허용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함성을 지르며 거리에서 국민들과 함께 한다고 해서 위의가 결코 손상 받지 않습니다. 청정함은 현실 자체이고 광장에서도 구현될 수 있습니다. 청정한 스님의 모습을 현실에서 그리고 진정한 화엄진법회에서 구현해 주십시오. 이 오탁악세의 시대에 불교인으로서 더 이상 부끄럽지 않도록.

선택은 본인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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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지 제휴사인 불교닷컴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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