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이 풍수지리설을 이인으로부터 배운 것은 위의 비문에서도 나타나는 바이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혜철 선사로부터 선을 배웠다. 주지하듯이 그는 혜철의 문하에 들어간 지 3년 만에 선의 구경을 체득함으로써 혜철선사의 인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혜철 선사도 풍수지리설을 익혔음은 혜철비문의 내용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혜철이 당에 유학 갔을 때 일행(一行) 계통의 중국 풍수법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고 당연히 도선은 혜철로부터 자생풍수와 함께 그것을 같이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일행의 풍수는 신비적인 요소만을 제거한다면 훌륭한 과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니, 만일 이러한 학문의 계통을 습득한 사람이 도선이었다고 한다면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당시 신라 국토의 자연환경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선이 사망하고 고려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등의 과정을 거쳐 미신적인 풍수도참설로 변하였던 것과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1) 왜냐하면 도선 풍수지리설의 목적이 땅의 이치를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땅과 그 땅에 의지하여 살고자 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확정짓고자 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논리체계를 만들고 거기에 땅을 투영하여 적부나 진부를 판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땅과 인간 사이의 상생, 조화관계, 다시 말해서 풍토적응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2) 뿐만 아니라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결함이 있는 땅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이 도선 풍수지리설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선의 풍수원리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독창적인 부분은 비보(裨補)의 원리이다. 주지하듯이 침뜸술의 기본 원리는 기(氣)가 과한 곳은 사(瀉)해주고 허한 곳은 보(補)해 준다는 것이다. 소위 보사(補瀉)의 원리이다. 도선은 이 원리를 그대로 땅에 적용하여 우리 풍수의 한 큰 특징을 만들어 내었으니 그것이 바로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이다. 그는 땅을 사람의 몸처럼 살아있는 어떤 것으로 인식했다. 거기에 덧붙여 도선은 사람의 몸과 같은 살아있는 땅에 문제가 있으면 고쳐서 쓴다는 생각을 덧붙였다. 이는 자생풍수의 특징을 말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땅이 살아있다는 생각은 풍수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그러나 비보의 원리는 중국풍수에는 없는 우리 풍수만의 자생적인 특징이고 그 기원에 도선이 있는 것이다.

중국풍수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 비보관념이 우리 풍수에 나타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중국 풍수의 원류인 화북지방의 연평균 강수량이 700mm 정도의 반건조지역이므로 땅을 고쳐서 쓴다는 생각을 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고, 또 국토가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보다 훨씬 넓기 때문에 고쳐 쓴다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다시 찾는 다는 생각이 앞섰을 것이다.

비보사탑설이란 무엇인가. 산천지리에는 생기가 있으며 따라서 순역·길흉·성처·쇠처가 생기고 그것이 음양상생·상극·상보의 원리에 의하여 변화하며 그 지상(地相)이 왕조의 흥망성쇠나 인간 장래의 길흉화복의 근원이 된다고 하는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로 확장되기도 한다. 왕업과 관계되는 지덕은 쇠처에 사원을 건립함으로써 생기를 보하지만 거꾸로 맞지 않으면 지적이 훼손된다. 따라서 도선은 쇠처, 역처 등을 보아 사원 건립지를 점정(占定)하고 그 이외에는 일체의 창건을 막았다.3)

우리는 도선 풍수가 발복의 명당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병든 땅을 고치려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4) 그렇기 때문에 도선은 삼한의 3,800여 곳을 택하여 마치 사람에게 병이 들었을 때에 혈맥을 찾아 침을 놓고 뜸을 떠서 고치는 것처럼 산천이 병이 들었을 때에 그 지점에다가 절을 세우고 탑을 세워 산천의 병을 고치려 했던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도선은 운봉산 밑에서 토굴을 파고 참선하기도 하고, 혹은 태백과 같은 큰 바위 앞에 띠집을 짓고 좌선하기도 하는 등, 전국을 방랑 수련하였다.5) 이때 도선은 오랜 국토편력을 통해서 역사의 무대가 경주 중앙 중심에서 지방으로, 역사의 주인공이 중앙 귀족에서 지방 호족으로 바뀌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선은 신라 고대사회의 해체를 눈앞에 내다보면서 살다 간 선승이자 새로운 지식인으로서 경주 중앙귀족들의 부패와 무능, 통일된 안정을 바라는 일반 백성들의 염원 등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인식을 종합하여 비기 형태로써 체계적으로 정리된 풍수지리설을 내놓은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오늘날 자료의 부족으로 잘 알 수 없지만, 그것은 국토 공간의 중심적인 위치를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경주로부터 중부 지방의 송악으로 옮기고자 했던 국토재계획안적인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6)

그렇다면 도선과 태조 왕건 및 고려 왕실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자세히 살펴보자.

그 후 신라의 정교(政敎)가 침쇠(寢衰)하여 국가 위망(危亡)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장차 성인(聖人)이 천명을 받아 특기(特起)할 사람이 있을 줄 알고, 그 길로 송악군(松岳郡)에 갔더니, 그때 우리 세조(世祖)께서 군방(郡方)에서 거택(居宅)을 짓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그의 문전(門前)을 지나면서 이르기를, “아! 이곳은 마땅히 왕자(王者)가 출생할 곳 이언만 다만 경시(經始)하는 자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 했다. 그 때 마침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이 말을 듣고 집안으로 들어가 이 사실을 세조(世祖)에게 전하였다. 세조는 급히 나와 스님을 집안으로 영입(迎入)하여 그 모책(謀策)과 개영(改營)에 대해서 자문하였다. 스님께서 대답하되, “2년 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대답하고, 이어 책 1권을 지어 겹겹으로 봉(封)하여 세조(世祖)에게 주면서, “이 책은 아직 출생하지 아니한 군왕(君王)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 장실(壯室)에 이른 후에 전해 주라”고 당부하였다. 바로 이 해에 신라 헌강왕이 즉위(卽位)하였는데, 당(唐)나라 건부(乾符) 2년에 해당된다. 4년(877)에 이르러 태조 왕건(王建)이 과연 전제(前第)에서 탄생하였다. 그 후 장년(壯年)에 이르러 스님이 준 책을 받아 보고서야 천명(天命)이 자신에게 내려진 줄 알고, 드디어 구폭(寇暴)한 무리를 제거하고 비로소 구자(區字)에 나아갔으나, 공손히 신중(神聖)의 뜻을 받든 것이지, 어찌 천하(天下)를 소유할 욕심이 있었겠는가?7)

위의 비문에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도선과 왕건의 관계가 많이 견강부회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비록 부회된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의 선승과 지방호족, 풍수지리설과 지방호족의 관계를 나타내 주고 있는 자료로서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위의 비문에서 ‘그 후 신라의 정교가 침쇠하여 국가 위망(危亡)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장차 성인이 천명을 받아 특기할 사람이 있을 줄 알고, 그 길로 송악군에 갔더니, 그때 우리 세조께서 군방에서 거택을 짓고 있었다’라고 한 것은 도선이 분명하게 신라 사회의 모순이 격화되어 더 이상의 지탱이 불가능한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며 나아가 그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교체세력으로서 중앙의 진골귀족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일 것이다.8)

그 결과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도선은 역사의 무대가 경주에서 송악지방으로 옮겨가고 있었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국토재계획안적인 성격을 가진 그의 풍수지리설을 세상에 내놓았으며, 송악의 여러 가지 이점을 풍수지리설의 입장에서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선은 당시 선종과 함께 유행하고 있었던 풍수지리설을 집대성하거나 대변하여 주는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승려였을 것이고 그것이 마침내 왕건 및 고려 왕조 건설세력과 연계되면서 왕씨 세력의 성장을 합리화하여 주는 것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9)

다시 말해서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지방의 지배자들인 호족뿐만 아니라 오랜 전란에 지쳐 통일된 안정을 고대하고 있던 일반 백성들에게도 커다란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도선은 전국토의 환경을 유기적으로 파악하려는 인문지리적인 지식에다 경주 중앙 귀족들의 부패와 무능, 지방 호족들의 대두, 통일된 안정을 바라는 일반 백성들의 염원 등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인식을 종합하여 풍수지리설로서 체계 있게 정리하였다. 이러한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역사무대를 동남부 중심의 경주 중심에서 중부지방인 송악으로 옮기게 하였고, 역사의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 귀족에서 지방의 호족으로 바뀌게 하여 송악지방에서 대두한 왕건에게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유리한 입장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10)

주지하듯이 왕건의 <훈요십조> 가운데 3조가 풍수지리설과 관계된다. 그 중 1조는 직접 도선을 언급한다. 다음을 보자.

모든 사원은 다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가리고 점쳐서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정(占定)한 이외에 함부로 더 창건하면 지덕(地德)을 엷게 감소시켜서 왕업이 길지 못하게 되리라”라고 하였으니, 짐은 후세의 국왕, 공후, 조신들이 각각 원당(願堂)이라 칭하고 혹시 더 창건한다면 크게 우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라 말기에 부도를 다투어 짓더니, 지덕이 쇠퇴하고 줄어들게 만들어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것인가.11)

훈요는 국가를 다스릴 요체를 전한 것인데, 왕조 경영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훈요 안에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시되고 있어 흥미롭다. 고려 태조의 도선 숭상은 결과적으로 풍수지리설을 고려왕실에서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셈이 되고, 이로부터 풍수도참은 도선 국사와 관련하여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것이다.

고려 인종은 1128년 소를 내려 “원효·의상·도선은 모두 고승이니, 소관 사로 하여금 봉증케 하라”12)고 한다. 왕실에서는 도선을 원효와 의상에 버금가는 대표적인 고승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래의 풍수설은 나말의 혼란한 사회상황 아래 강한 신앙적인 성격을 가지고 확산 유행하다가 선문의 도선에 의하여 체계적인 이론이 정비되고 고려왕조의 창업기에 선종과 함께 수용되었다고 보여진다. 그 결과 불교는 왕실의 복전으로 풍수지리설은 왕업의 번영과 민심을 끄는 호국의 원리로 신앙사상의 저변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도선의 왕조적 위치의 확립에 따라 불교의 도참사용, 즉 풍수도참의 불교적 전개가 활발해진다. 이에 이르러서는 도선에 대해서도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성과 관계없이 도참설화에 따른 다양한 전개를 가져오는 것은 충분하게 유추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고려 풍수지리설은 도선에 의하여 대성된 그것이, 신왕조 탄생의 정당성을 중심으로 고려 왕실에 수용된 이래, 주로 국교적 위치를 점하고 있던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으며, 신앙적 성격을 띠고 도참의 뿌리를 내린다. 그것이 비록 독자적인 신앙의례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도, 조야와 승속을 불문하고, 널리 신앙사상의 전 영역으로 확대된 점은 고려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목해야할 사항이 되는 것이다.13)

그렇기 때문에 고려 말의 고승인 태고보우(1310∼1382)가 도참설을 응용하고, 조선왕조의 창업에 있어서 무학 자초(1327∼1405)가 한양을 도읍으로 점정하고 있는 것에도 그 기원에는 엄연히 도선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선이 비록 우리나라 산천의 낙처에다 사원이나 탑을 세워 산천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비보사탑설을 주장하였지만, 그는 본래적으로 ‘절을 세우고 탑을 세워 얻어진 국가적 이익과 공덕이 선리(禪理)의 정오함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본 선사였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14)

다시 말해서 도선 사상의 본질은 선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동리산문의 법맥을 이어받은 선승으로 자리매김을 하여야 한다. 이에 비해서 풍수지리설은 당시 사회에서 요청된 바에 따라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사용한 보살행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의 이익과 나라의 평안을 간절히 나타내고 있는 도선의 산천비보의 풍수지리 사상이 고려 태조의 강렬한 고려 건국의 열망과 결합하여 크게 성행하였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도선은 비보사상을 통하여 불교의 세력을 부흥시키려 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주) -----
1) 최병헌, <도선의 풍수지리설과 고려의 건국이념>, 《도선국사와 한국》, 대한전통불교연구원, 1996. p.126.
2) 최창조, <한국 풍수지리설의 구조와 원리>, 《도선국사(道詵國師)》, 불교전기문화연구소, 1997. p.292.
3) 양은용, <도선국사 비보사탑설의 연구>, 《도선연구》, 민족사, 1999. pp.135~136.
4) 최창조, <한국 풍수지리설의 구조와 원리>, pp.202-203.
5) 이지관(李智冠) 교감역주(校勘譯註),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 탑비문(光陽 玉龍寺 先覺國師 證聖慧燈 塔碑文)>,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校勘譯註歷代高僧碑文)》〈고려편(高麗篇) 3〉, 가산문고(伽山文庫), 1996. p.436.
6) 최병헌, <도선의 풍수지리설과 고려의 건국이념>, pp.255~256
7) 이지관 교감역주, <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 탑비문>, pp.437~438.
8) 최병헌, <도선의 생애와 나말여초의 풍수지리설>, p.135.
9) 위의 글, p.141.
10) 위의 글, p.170.
11)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1, ‘태조(太祖) 26년 4월’, 아세아문화사영인본, 1973. pp.29~30.
12) 《고려사(高麗史)》권15.
13) 양은용,「도선국사 비보사탑설의 연구」, pp.131~133.
14)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권상. p.202.

이덕진 | 창원 문성대학교 교수, 010811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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