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업을 지어서 후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악업을 지었으면 이를 고뇌하고 후회하며, 선업을 지었으면 만족하고 안락을 얻는다. 곧 잘못을 저지르고도 뉘우치고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후회하는 악업을 짓지 않도록 마음과 행을 닦으라는 뜻이다. 불도에 가는 길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열반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마음으로 후회하고 뉘우치지〔悔心〕 않는 마음과 행이 이루어져야 안락과 선정을 얻고 장차 해탈을 얻으며 열반에 이른다고 한다.

후회하지 않는 마음과 행이란 곧 우리의 행실이 바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에서는 우리 중생들이 이런 마음과 행에 의지하여 바른 계행을 닦을 때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중생들 속에는 다음과 같이 네 부류가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행은 세밀하나 마음이 바르고 진실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이 세밀하나 행실이 바르고 진실하지 못하며, 어떤 사람은 마음도 세밀하고 행실도 바르고 진실하며, 어떤 사람은 마음이 세밀하지도 않고 행실도 바르고 진실하지도 않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도 세밀하고 행실도 바르고 진실하게 하는가. 보통 중생들이 이런 마음과 행실을 바로 알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런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하고, 오래 있어야 하고, 지혜를 쓰고, 깊이 관찰하는 등 네 가지를 구족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과 행실을 바르고 진실하고 세밀하게 닦는 것을 함께하고, 오래 익히고, 지혜롭게 알고, 잘 관찰해야 비로소 바른 계행이 갖추어져서 불성과 여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과 행은 바로 계행을 말하는 것으로, 바른 계행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른 계행에 대해서는 다음의 여섯 가지를 설하고 있다.

첫째, 계행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끝까지 지키는 계행과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계행이 있어서 끝까지 지키는 구경의 계행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계행이 이양(利養)을 위해 한동안 지키는 것이라면 구경의 계행이라 할 수 없다. 비록 나쁜 중생의 상해를 받더라도 끝까지 지킬 때 구경의 계행이라 한다. 모름지기 여래는 구경의 계행으로 성취된다고 한다. 구경의 계를 지키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선남자여, 예전에 한번은 사리불과 오백 제자가 함께 마가다국 첨파성에 있었다. 그때 비둘기 한 마리를 사냥꾼이 쫓아왔는데 그 비둘기가 무서워서 사리불의 품속에 들어와서는 파초나무처럼 떨었으나, 나의 품속에 와서는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무서운 마음이 없어졌다.”

이와 같이 끝까지 실천하는 구경의 계행은 성문 연각도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계행에는 정법을 위한 계행과 이양을 위한 계행이 있다. 이중에서 자신의 이양을 위하여 계를 받아 지키는 경우는 불성이나 여래를 보지 못하므로, 비록 불성과 여래의 이름을 듣더라도 들어서 본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정법을 위하여 계율을 받아 지녀야 한다. 이 계행으로 만이 불성과 여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뿌리가 깊은 계행과 뿌리가 얕은 계행이 있다. 뿌리가 깊은 계행은 뽑기 어렵고, 뿌리가 얕은 계행은 흔들리기 쉽다. 따라서 공(空)하고 무상(無相)이고 무원(無願)을 닦아 익힌 것은 뿌리가 깊어서 뽑기 어렵고 이러한 세 가지 삼매를 닦지 않은 계행은 비록 25유(有)를 닦더라도 뿌리가 얕아 흔들리기 쉽다고 한다.

넷째, 자신을 위한 계행과 중생을 위한 계행이 있는데, 중생을 위한 계행을 닦는 이는 불성과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다섯째, 스스로 계행을 갖추는 것과 다른 이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갖추는 계행이 있다. 계를 받은 뒤에 오랜 세월 동안 잃어버리거나 나쁜 세상 나쁜 사람을 만나고 나쁜 법을 듣더라도 본래와 같이 계율을 지키고 범하지 않음을 제 성품으로 가진다고 한다. 이에 비해 계사를 만나서 백사갈마(白四羯磨)하고 화상이나 승가 등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지해야 비로소 행동할 줄 알고 법을 듣고 법을 말하며 위의를 갖추는 경우는 남에게 의지하는 계행이라 한다. 제 성품으로 가지는 계행은 불성과 여래를 볼 수 있지만, 이와 같이 남에게 의지하는 계행은 그렇지 못하다.

여섯째, 성문의 계와 보살의 계가 있는데, 처음 마음을 낼 적부터 아뇩보리를 이룰 때까지 계행을 실천하는 것을 보살의 계라 하고, 부정관(백골관)을 닦거나 아라한과를 증득할 때까지 계행을 실천하는 것을 성문의 계라 한다. 보살의 계를 받아 지니면 아뇩보리를 이루며 불성과 여래와 열반을 볼 것이다.

결국 바른 계행이란 구경의 계행을 이루어야 하고, 정법을 위한 계행이어야 하고, 뿌리가 깊은 계행이어야 하며, 중생을 위한 계행을 갖추며, 자기 스스로 성품으로 계행을 갖추고 남으로부터 들어서 계행을 갖추며, 보살의 계를 받아 지녀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계행을 이루는 것은 마음으로 후회하지 않기 위함이며, 후회하지 않음은 곧 안락을 받기 위함이며, 안락을 받는 것은 괴로움을 멀리 여의기 위함이며, 멀리 여의는 것은 편안하기 위함이며, 편안함을 얻는 것은 선정을 얻기 위함이며, 선정을 얻는 것은 진실하게 알고 보기 위함이며, 진실하게 알고 보는 것은 생사의 근심을 바로 알기 위함이며, 바로 아는 것은 마음이 탐착하지 않기 위함이며, 탐착하지 않는 것은 마침내 해탈을 얻기 위함이며, 위없는 대열반을 얻기 위함이며, 항상 하고 즐겁고 나이고 청정한 법을 얻으려 함이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을 얻기 위함이요, 불성을 보기 위해서 자기 성품의 청정한 계율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lkiw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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