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대로, 지도로, 지대로 등으로 불려…‘크고 세다’는 뜻
처음으로 시호 사용…국명 ‘신라’ 확정, 민생 시책 실시


제22대 지철로왕의 성은 김씨이다.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라 하였다.

437년에 태어난 지증왕은 신라의 제22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00∼514년이다. 지철로, 지도로, 지대로 모두 ‘지혜로울 지’를 쓰고 있으나, 그것은 시호인 지증왕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문맥을 보면 음경이 무척 컸다는 의미로 ‘지대(至大)’가 원래 한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지대는 지(지다나 지도)와 음이 통한다. 지철로의 철 역시 쇠〔鐵〕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 시호 등으로 인해서 총명하다는 의미의 철(哲)로 바뀐 것이다. 설화에서야 음경이 크다고 했지만 결국 ‘크고 세다’라는 뜻에서 쇠 또는 철의 의미가 나온 것일 수 있다.

어렸을 적에야 자랑이지만 나이가 늙고 장수를 하면서 조금 창피했을 것이다. 그러니 음은 같아도 뜻이 다른 글자로 서서히 바뀐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아무리 내외가 없는 사회라고 하더라도 처음으로 ‘마립간’을 넘어 ‘왕’이 된 사람이니 어렸을 때의 이름(아명)을 함부로 부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철로가 나온 것 같다. 길이라는 의미의 ‘로(路)’ 역시 당시의 도량형이 좀 다를 수는 있으나 대충 잡아도 45cm나 되는 대물은 정말 ‘쭉 뻗은 길 같다’는 상상도 가능할 듯하다. 좀 이야기는 다르지만 ‘길 로(路)’ 자를 일본어로는 ‘지’라고 적는다. 까닭에 남성 여성의 성기에 붙은 ‘지’ 역시 결국 ‘길 로’ 자라는 한자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지증왕은 내물마립간의 증손이며,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 씨로 눌지마립간의 딸인 조생부인(鳥生夫人)이다. 왕비는 박 씨 이찬(伊飡) 등흔(登欣)의 딸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왕은 몸이 건장했으며 담력이 있었다고 한다. 재종형인 소지마립간이 후계자 없이 죽자 64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4 ‘지증마립간’ 조에 따르면 “나물왕의 증손으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고 소지왕(炤知王)의 재종 동생이었다. 왕은 체격이 매우 컸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전왕인 소지마립간이 아들 없이 죽자 그의 왕위를 이어 받았다. 왕에 즉위할 당시 그의 나이는 64세였다.”고 한다.

시호는 지증(智證)이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시호를 사용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4 ‘지증마립간 15년 춘정월’ 조에도 같은 기록이 확인된다.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신라에서 시법(諡法)을 처음 사용한 왕이다. 그렇다고 법흥이나 진흥이 시호라고 봐서는 안 된다. 법흥 등은 생시에도 사용했던 것으로 금석문 등에 확인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말로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 하였는데, 이 왕 때부터 사용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신라 제17대 나물왕 때부터 사용하고 있어 이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이전에 한 번 다룬 바가 있어 생략한다. 지증왕이 시호를 받을 정도로 무슨 일을 했을까? 아니면 시호를 안 하면 무서운 사람이었을까?

지증왕은 502년(지증왕 3)에 우경(牛耕)을 시행하고 순장(殉葬)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고, 주군(州郡)에 명해 농업을 권장하도록 하였다. 503년에는 국명을 신라로 확정했다. 신라라는 국명은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新者德業日新 羅者綱羅四方之義〕.”는 뜻에서 취했다. 505년에는 친히 국내의 주(州)·군(郡)·현(縣)을 정하는 주군제도(州郡制度)를 실시했다. 이 밖에도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고, 서울에 동시(東市)를 설치했으며, 선박의 이익을 권장하는 등 일련의 의례와 민생에 관한 시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왕은 영원(永元) 2년(500) 경진(庚辰)에 즉위하였다. 혹은 신사(辛巳)라 하니 곧 (영원) 3년(501)이 된다.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1척 5촌이나 되어 훌륭한 배필을 구하기가 어려워 사신을 삼도(三道)에 보내 배필을 구하였다.

즉위년은 칭원법에 따라 가끔 오류가 난다. 이 또한 이전에 논한 바 있다. 원전에 너무 야한 말이 나와서 어쩔 수 없이 말하자면, 음경의 길이가 지대하게 길어서 모두들 무서워했나보다. 그래서 아무도 겁이 나서 시집 가려 하지 않으니 왕경인 경주에서 삼도 즉 북, 서, 남으로 사람을 보낸 것 같다.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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