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서출지. <사진=경주시관광자원영상이미지>

해일(亥日) 애정, 자일(子日)은 구설수 조심하는 날
까마귀에게 제삿날은 정월 보름 또는 정월 열엿새
 

이로부터 나라의 풍습에 매년 정월 상해일(上亥日)·상자일(上子日)·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삼가며 감히 경고망동하지 않았다.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일(上午日)에 나오는 해·자·오는 천간(天干)인 12지 가운데 돼지·쥐·말을 말한다. 상이란 그 달의 첫 번째를 말하니, 첫 번째 해일(亥日)·자일(子日)·오일(午日)을 일컫는다. 결국 매년 정월의 상해일이 1일이라고 하면, 상자일은 2일이 되고 상오일은 8일이 된다. 새해 첫 이틀 동안 무척 조신하게 지내다가 한 주 뒤에 하루 또 조신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오일(午日)이 나왔을까? 조작된 것으로 봐도 크게 틀림이 없는 앞의 설화를 보면, 쥐와 돼지가 나오는 것은 알겠는데 말은 안 나온다. 결국 까마귀를 쫓아가는 기사가 말을 탔다는 것으로 유추해 볼 수밖에 없다.

유추야 가능하지만, 굳이 말의 날에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해의 날은 불륜이나 애정 관련된 일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쥐의 날은 입조심 말조심도 매우 중요하지만 구설수를 타지 않게 조심하라는 뜻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의 날은 쫓아와서 잡아갈 수 있으니 관재수를 조심하라는 뜻 같다. 이렇게 따지면 해석이야 된다. 하지만, 대체 이 사건이 무슨 의미가 있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재종형인 소지마립간이 후계자 없이 죽자 지증왕이 64세의 나이로 다음 왕위를 계승하였다. 후계자 없이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고 다만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는 아이만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여하튼 소지왕이 무척 아끼던 후비 하나가 승려와의 연분 또는 연분설에 휘말려 처형이 되었다. 이런 기사를 전한 일연 스님이야 승려들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사람들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친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과연 무엇 때문에 상해·상자·상오일까지 지키며 경고망동하지 못하게 했을까? 여하튼 소지왕 후비의 로맨스는 불륜에 의한 처형으로 막을 내렸다.

15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삼아 찰밥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까지 이를 행한다.

1월의 15일이니 정월대보름을 가리킨다. 한자어로는 원소절(元宵節), 원석절(元夕節), 원야(元夜), 원석(元夕), 상원(上元), 달도(怛忉), 등절(燈節), 제등절(提燈節) 이라고도 한다. 이 가운데 상원이란 중원(中元 : 음력 7월 15일, 백중날)과 하원(下元 : 음력 10월 15일)에 대칭이 되는 말로서 이것들은 다 도교적인 명칭이다.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날에 대하여 성현(成俔)의 칠어고시인 ‘향반(香飯)’,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시부에 실린 ‘궁사(宮詞)’, 《경도잡지(京都雜志)》·《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정월 보름이라 기술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동경잡기(東京雜記)》·《해동죽지(海東竹枝)》에서는 정월 열엿새라 기술하였다. 제사를 밤에 지냈나 보다. 대충 자시 즈음에서 지내다 보니, 기술함에 있어서 15일 밤이나 16일 새벽이 되는 것은 아닐까? 여하튼 정월 16일에 찰밥을 만들어 까마귀에게 먹임으로써 역경에 처한 소지왕의 신세를 갚은 셈이 된다.

고대 사람들은 까마귀를 태양·신의 사자·신의(神意) 전달자·신의 승물(乘物) 등의 상징적 신조(神鳥)로 사유하였다. 현재 까마귀를 위한 찰밥 제사는 사라졌지만 약밥이 전승되고 있다. 약밥(藥飯) 이외에 이날에는 귀밝이술, 오곡밥(五穀飯) 등을 먹는 세시풍속이 있다.

향언(鄕言)으로 달도(怛忉)라고 했다. 슬퍼하고 조심하며 모든 일을 금하고 꺼려한다는 것을 말한다.

달도의 내용은 전하지 않고 유래만이 《증보문헌비고》에 전한다. 《동도악부(東都樂府)》에도 〈달도곡(怛忉曲)〉이 있다고 하였으나 이는 김종직(金宗直)이 그 내력을 소재로 지은 한시이며, 원가(原歌)는 아니라고 한다. 무척 슬픈 노래라고 하는데, 왕이 목숨을 구했는데 왜 슬픈지 모르겠다. 왕이 배신을 당해서 슬픈 걸까? 혹시 죽은 후비의 애절한 로맨스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슬픈 걸까? 그것도 아니면 후비가 누명을 쓴 것이기에 슬픈 것은 아닐까? 참으로 이해가 쉽지 않다.

그 연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부른다.

노인이 나와서 문서를 바친 연못이니 한자로 하면 서출지가 맞다.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1길 17(남산동)에 위치한 서출지는 사적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월성(月城)에서 남천(南川)을 따라 남산 동편으로 접어들면 정강왕릉을 지나 남산동에 이른다. 남산동 한가운데에 심층석탑 2기가 있고 바로 근처에 양피못이 있으며, 얼마 떨어져서 사금갑의 전설이 간직된 서출지가 있다. 이 연못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못으로 보이며 곡지(曲池)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노인은 누구일까? 용왕인가?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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