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대승경전인 《금강경》은 한문으로 번역되어 동방에 전해졌고, 한반도 불자들은 다시 한글로 번역된 후에 이 경전을 읽을 수 있었다. 여태껏 우리가 읽어온 《금강경》은 과연 초기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담고 있을까?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자로, 또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변질된 내용은 없을까?

이 같은 질문에 이중표 전남대 교수는 최근 펴낸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으로 답한다. “《금강경》은 산스크리트 원본으로 해석하고 근본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해석되어야 합니다. 《금강경》을 바르게 이해할 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모두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이 교수가 2016년 1월 서울과 광주, 구례에서 강의한 내용을 손질한 결과물이다. 《금강경》의 산스크리트어 전문과 한역 전문을 수록하고, 이를 니까야적 시각으로 분석했다. △금강경의 취지 △보살의 길 △평상심에 길이 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지금, 여기에서 현재의 법을 통찰하는 행복한 삶 등 다섯 개의 장을 통해 《금강경》이 근본불교경전인 《니까야》와 《아함경》에 근거함을 밝힌다.

▲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저자 이중표 교수가 18일 열린 출판간담회에서 저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1월 18일 교계 기자들과 출판간담회를 가진 이 교수는 “실제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공(空)’이 아니라 ‘무쟁(無諍)’”이라고 말했다. 그는 “불교에서 공사상이 배제될 수 없지만 공을 강조하냐 아니냐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면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화합하라, 다투지 말라는 것이고, 무쟁을 강조한 이유는 당시 각자의 이론을 가지고 대립한 부파불교에 대한 반성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기존 한역 경전처럼 부처님이 여래의 32상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인생이 허망하다[空]고 말하는 것은 문맥상 맞지 않다. 반면 산스크리트본에는 ‘여래가 32상과 같은 여러 가지 상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한다. 이는 32상의 실체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부처님같이 살 수 있고 모든 중생이 평등하다는 것, 즉 특징이 없는 것이 여래의 특징이라는 뜻”이라며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번역이 한역되면서 형이상학적으로 변주됐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금강경》을 바로 이해하면 대승불교에 대한 역사적 서술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금강경》에서는 대승(마하야나)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보살승(보디사트와야)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처음부터 대승불교가 보살승을 주창했던 것이며 《금강경》은 보살승의 초기경전이라고 보여진다”면서 “일체중생이 무여열반에 드는 세상으로 가자는 주장이 금강경의 핵심이라면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는 조계종이나 한국불교 자체가 훨씬 더 사회적인 측면을 갖게 될 것이고 불자로서의 사명들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국의 불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독송하고 수행하는 경전이기 때문에 더더욱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면서 “특히 금강경에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기존의 내용과 어떤 것이 같고 다른지 비교하는 시간을 가져볼 것을 권한다”고 말했다.

이중표 역해 | 민족사 | 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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