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문제를 풀 수 있을까요 문제도 문제 나름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는 문제도 있습니다. 화가 났을 때, 몸이 아플 때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어집니다. 시간이 약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풀어지지 않는 문제도 있습니다. 생로병사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또 하나 어려운 문제는 삶에서 얽히고설킨 문제입니다. 난마처럼 얽혀 있는 문제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엉킨 매듭을 풀려면

문제에 직면 했을 때 문제를 풀려면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듯이 난마처럼 얽힌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혼란스런 마음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지혜는 고요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지금 회사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저것으로 머리가 혼란스런 최고경영자에게서 좋은 해법이 나올 리 없습니다. 그럴 경우 골방에 들어가 좌선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오늘날 애플신화를 창조한 ‘스티브 잡스’는 ‘선수행’을 했습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했을 때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을 것입니다.

지혜는 선정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이는 법구경에서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Dhp372)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지혜는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고요하게 했을 때 혼란스런 마음 보다 더 정확한 판단을 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난마처럼 얽힌 문제에 대한 해법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난마처럼 얽힌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은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 (S1.23) 라 했습니다. 계, 정, 혜 삼학을 닦은 자가 얽히고설킨 문제를 풀 수 있음을 말합니다. 결국 탐, 진, 치에서 벗어난 지혜로운 자만이 난마와 같은 엉킴을 풀 수 있다는 말입니다.

대통령의 눈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난마처럼 엉켜 있습니다. 잘못 뽑은 지도자로 인하여 고통 받는 것도 탐, 진, 치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물에 약합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5%로서 역대 최저 급이지만 대통령의 눈물 한 방울로 반전의 계기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회견장에서 종종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은 의미도 있을 수도 있지만 정략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를 ‘악어의 눈물’이라 합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눈물을 무기로 삼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여자는 울음으로 남자를 묶는다.”(A8.17)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남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을 묶는 방법은 가지가지 입니다. 외모로, 언설로, 노래로, 울음으로, 자태로, 꽃과 과일로 묶습니다. 이 중에서 우는 것이 아마 강력한 수단일 것입니다. 기자회견장에서 불쌍한 모습으로 우는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감성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미지에 속은 국민들을 또 한 번 속이려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난무하는 곳

국민들은 정치인들에게 매번 속습니다. 이미지에 속고 말에 속습니다. 불리한 것은 감추고 유리한 것만 드러내기 때문에 진실한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일이 터졌을 때 잘못 판단한 것임을 그제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의 회견 앞에 또 다시 넘어 갑니다.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하는 곳이 어디일까요 ‘썰전’에서 전원책 변호사에 따르면 법정이라 했습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 법정에 서면 대부분 ‘모른다.’거나 ‘기억에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법정에서의 거짓말은 초기경전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맛지마니까>에 따르면 오계 중의 망어에 대하여 “거짓말을 말합니다. 법정에 불려가거나 모임에 나아가거나 친지 가운데 있거나 조합에 참여하거나 왕족 가운데 있거나 증인으로서 질문을 받아, ‘오, 이 사람아,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하라.’라고 하면, 그는 모르면서도 ‘나는 안다.’고 대답하고, 알면서도 ‘나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보지 못하면서도 ‘나는 본다.’고 말하며, 보면서도 ‘나는 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자신을 위하여, 혹은 타인을 위하여, 혹은 뭔가 이득을 위하여 고의로 거짓말을 합니다.”(M41) 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짓말이 난무하는 곳은 법정이라 합니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이는 경에서 알면서도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을 때 거짓말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증언을 하는 이유는 ‘이익’ 때문이라 했습니다.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불리한 것은 숨기는 것입니다.

거짓말이라 하여 반드시 사람을 속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을 때 모두 거짓말로 봅니다. <상윳따니까야> 제석천의 7대 서원을 보면, 그 중에 하나가 “나는 살아 있는 한 진실을 말하리라.”(S11.12) 입니다. 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모른다.’거나 ‘기억에 나지 않는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강자와 약자가 대립했을 때

지지율 5%대의 대통령회견이 있었습니다. 일체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는 기자회견장에서 대통령은 눈물을 글썽이었습니다. 마음 약한 국민들은 대통령의 울먹임에 또 다시 동정의 시선을 보낼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정치인들이 ‘눈물 쇼’하는 것쯤은 일상화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얽히고설킨 난마와 같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까요.

정치인들에게 불교적 지혜관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탐, 진, 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혜가 있다면 살아가는 지혜일 것입니다. 생존을 위하여 거짓 증언을 하고 거짓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는 엉킨 매듭을 풀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교적 지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 강자와 약자가 있습니다. 대통령과 국민들의 관계를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강자인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합니다. 아무리 잘못해도 가지고 있는 권한 일부만 행사해도 국민들의 입과 귀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저항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제석천과 아수라가 전쟁을 했습니다. 아수라가 싸움을 걸어 온 것입니다. 아수라는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밧줄로 꽁꽁 묶여 제석천 앞에 끌려 나온 아수라대왕에 대하여 하늘의 대신들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신중의 한명은 “제어 하는 자가 아무도 없으면, 어리석은 자들은 전보다 더욱 화를 내네. 그러므로 강력한 처벌로 현자는 어리석은 자를 눌러야 하네.”라고 강력한 처벌을 주장합니다.

강력한 처벌은 독재국가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법과 원칙이라 하여 강자의 힘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모든 독재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제석천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제석천은 이렇게 게송으로 말했습니다.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S11.4)

제석천은 인내를 강조했습니다. 전쟁에 패하여 포박당해 끌려와 있는 아수라대왕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의견이 있지만, 신들의 제왕 제석천은 인내할 것이라 합니다. 이에 대하여 ‘힘 있는 자의 인내’라 했습니다.

힘 있는 자의 인내

힘이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가 있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도 이에 해당됩니다.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대통령이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지지율이 고작 5% 로서 역대 최저입니다. 그럼에도 힘은 막강합니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감정에 호소합니다. 그러나 해법은 보이지 않습니다. 국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대통령은 강자입니다. 최고 권력에 도전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국민들이 원한다면 받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강력한 처벌로 국민을 짓누르려 한다면 문제가 점점 더 커지고 꼬여만 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얽히고설킨 매듭을 풀어야 할까요. 그것은 강자의 인내입니다.

약자는 언제나 인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약자와 강자가 충돌했을 때, 예를 들어 노동쟁의가 발생했을 때 사용자들은 대부분 힘으로 억누르려 합니다. 그러나 문제만 더 꼬이게 할 뿐입니다. 이럴 때는 강자가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자의 인내입니다.

노사문제가 발생했을 때라든가, 국민과 정부가 대립했을 때 원로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약자에게 참으라고 말합니다. 강자 편을 들어 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용기 있는 자라면 강자에게 인내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인내는 강자가 하는 것입니다. 약자는 언제나 인내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약자에게만 인내를 강요한다면 강자를 위한 것이 됩니다. 이런 현상은 정치권에서뿐만 아니라 불교내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총무원장 직선제 수용해야

한국불교에서 언론탄압이 시작 된지 만 일 년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시대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불교닷컴>과 <불교포커스>에 가해지고 있는 조계종의 언론탄압을 보면 봉건시대에 사는 것 같습니다. 비판적 기사를 썼다고 하여 승가모독이니 스님모독이니 하여 말살 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언제까지 지속될지 기한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른바 오종세트규제라 하여 더욱더 목을 조르고 있는 형국입니다.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속았듯이, 불자들은 조계종 지도층에 속았습니다. 조계종을 대표하는 총무원장스님이 약속을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게 어긴 것입니다. 연임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뒤집는가 하면, 직선제공약을 말해 놓고서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망어죄에 해당됩니다. ‘승단 추방죄’입니다. 그럼에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비판하는 스님에게 폭력을 가합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스님을 주지 직에서 내 쫓아 버립니다.

한국불교에서 총무원장스님은 강자입니다. 대통령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의식 있는 스님들과 불자들은 개혁을 요구합니다.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매듭지어진 것을 풀기바랍니다. 그러나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매체에 대하여 ‘해종언론’이라 하여 불가촉을 명령합니다.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소통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거부했을 때 커다란 저항에 부딪칠 것입니다. 대통령이 국민들과 소통을 거부한 채 비선들과 국정을 논의했을 때 국민들은 분개 했습니다. 조계종총무원장스님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이익을 탐했을 때 스님들과 불자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 엉킨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한 가지 답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강자의 인내입니다. 자승 스님과 종회는 대다수스님들과 불자들의 염원을 받아 들여 총무원장 직선제를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약자는 늘 인내하기 때문에 약자에게 인내를 요구한다면 엉킨 매듭은 풀려 지지 않습니다. 이 엉킨 매듭을 풀려면 강자가 인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참으로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없는 자에게 인내하네. 그것을 최상의 인내라 부르네. 힘 있는 자는 항상 참아내네.”(S11.4) 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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