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이 화났다.
지난 토요일(11월 5일), 서울 도심은 국민들의 분노로 붉게 타올랐다.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는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하여 금세 광화문과 시청, 종로 일대를 가득 메웠다. 그들은 어느 특정 정파나 단체의 지시에 의해 강제로 모인 게 아니라 대통령의 잘못을 꾸짖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순수한 시민들이었다.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교 학생부터 머리 허연 중장년층, 그리고 연인과 부부, 부모 손을 꼭 잡거나 유모차를 탄 어린아이까지 그들은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는 작은 피켓과 촛불을 들고 조용하면서도 힘 찬 행진을 했다.

경찰은 시민들의 행진을 막기 위해 버스와 의경들로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행진을 물리력으로 제지하지 않았고, 시민들도 차분하고 질서 있게 자기들의 생각과 주장을 연호(連呼)했다. 십 수만 명의 시민이 모여 대통령을 비판하는 시위를 하면서도 특별한 충돌이나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우리 국민 의식이 그만큼 성숙하고 의젓해졌다는 사실의 방증이며, 이제는 어떤 불온한 세력이나 정권도 국민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명백한 징표로 보인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통령에게 크게 실망하고 분노했다. 대통령은 국민들의 기대와 신뢰를 저버리고 스스로 대통령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대통령은 자신에게 주어진 엄중한 권한을 몇몇 사람들과 사유화(私有化)하여 국가 시스템을 교란했고, 그들은 대통령의 권한과 권위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며 부당한 이익을 챙겼다. 어느 때나 권력자 부근에서 기생(奇生)하며 권력을 행사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무리들이 있기 마련이므로 언론에 거론되는 몇몇 모리배의 준동(蠢動)은 사법부의 엄정한 판단과 처벌에 맡기면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대통령의 행위는 대한민국 국민과 국가의 체면과 권위를 추락시킨 것이어서 단순히 넘길 사안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국가 원수이며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중심제 국가다. 그런 만큼 대한민국의 대통령에게는 엄청난 권력과 권위가 주어지며,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도 엄중하다. 대통령에게 완벽함을 기대하는 것이 과욕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으나, 국가의 최고지도자에게는 남다른 지혜와 용기, 절제와 아량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대통령은 재임 동안 단 한 번도 최고지도자로서의 지혜와 용기, 절제와 아량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많은 국민들이 그 점에 의아심을 가지면서도 독신 여성 대통령의 지나친 몸조심으로 이해하려 했으나. 결과는 국민들의 기대와 믿음을 송두리째 배신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한민국 국민이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공인(公人)으로서의 마지막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것이다. 사적(私的)으로는, 선친(先親)의 전례를 생각해서라도 주어진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더 나아가서는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싶을지 모르나, 그것은 개인적 욕심에 불과하다. 지난 토요일 집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많은 국민들이 대통령의 책임 있는 결단과 행동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과 방법은 어떻게 하면 국정혼란을 최소하고 민주적으로 정권이양을 할 준비를 하느냐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고 조금이나마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대통령의 가족사를 생각하면 연민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지금은 사적 감정을 논할 때가 아니다.

한 시인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노래한 바 있다. 지금 대통령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는 많지 않다. 떠날 준비를 철저히 하여 적시(適時)에 떠나는 것만이 대통령을 사랑하고 존경했던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동국대학교 교수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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