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우리 주변에서는 고승들의 탄신하신 날 혹은 입적하신 날 그분들 생전의 생생한 모습과 육성을 영상물로 다시 보고 추모하는 일이 있다. 그런데 이는 어떤 목적에서 미리 촬영한 것으로, 내 마음을 아시고 나를 위해서 보이거나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며, 더욱이 고인의 마음을 내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열반경》에서는 우리가 여래를 보고자 하거나, 여래의 말씀을 듣고자 하거나, 여래의 마음을 알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 밝히고 있다. 우리가 부처님을 직접 뵙고 법문을 들을 수 있다면, 또한 부처님 마음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경에서는 여래를 보고자 하면 대승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면 이룰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또한 수행 계위로 보면, 십주(十住) 보살은 불성의 눈으로 여래를 볼 수 있고 9지의 보살들은 불성을 들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십주보살은 육도의 생사고해를 여의고 불성을 보기 시작하므로 깊은 보살도를 닦아가는 계위이다. 또한 부처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불성을 체득하는 경지이니 보살 십지의 계위로 불도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처님을 뵙고 그 음성을 들어서 부처님의 마음을 얻는 길은 《열반경》을 열심히 수지하고, 읽고, 외우고, 서사하고, 해설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면 중생의 안목에서 보고 듣던 것이 청정해져서 눈으로 부처님을 보고, 귀로 부처님을 들을 수 있는 안목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일찍이 중국의 천태 지자대사(智者大師)는 이를 오종법사행(五種法師行)이라 하고, 중생들이 불도에 들어가는 법사의 수행법으로 정의하였다.

《열반경》에서는 우리가 여래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여섯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첫째, 여래의 신업과 구업을 통하여 알아차리는 것이다. 곧 여래의 몸으로 행하는 신업을 눈으로 보아서 알고, 여래의 입으로 설하는 구업을 귀로 들어서 안다는 것이다.

둘째, 여래의 수승한 형상과 소리를 통하여 알아차리는 것이다. 곧 여래는 얼굴빛이 중생의 그것과 달리 훌륭하고, 음성이 미묘하고 훌륭하여 중생과 다르니 이를 보고 들어서 안다는 것이다.

셋째, 여래의 신통과 심통을 보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곧 여래는 신통(身通)을 중생을 위하여 쓰시되 여래의 이양(利養)을 위해서 쓰지 않으므로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또한 여래는 타심지(他心智)로 중생을 위하여 말씀하시고 이양을 얻기 위하여 말씀하지 않으니 이 음성을 듣고 관찰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여래가 몸을 받고 설법하는 것을 보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곧 여래가 어떻게 몸으로 세상에 나왔고, 왜 몸을 받았으며, 누구를 위하여 몸을 받았는지 눈으로 살피는 것이다. 또한 여래가 어떻게 법을 말하고 왜 법을 설하며, 누구를 위하여 법을 설하는지 관찰하면 이를 귀로 들어서 아는 것이라고 한다.

다섯째, 신업이나 구업의 인행(忍行)을 통해 알아차리는 것이다. 곧 여래는 몸으로 짓는 악업에 대해서 화내지 않으며 이는 여래인줄을 눈으로 보아 아는 것이다. 또한 여래는 입으로 짓는 악업에 대해서 화내지 않으며 이는 여래인 줄 귀로 들어 아는 것이다.

여섯째, 몸의 모습과 소리의 설법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곧 여래는 몸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만약 보살이 태어나 7보를 걷고, 마니발타 등의 신장들이 나타나고, 세계가 진동하며, 난타용왕 등이 신통의 몸으로 목욕시키고, 모든 하늘들이 예배한다. 아시타 선인이 합장 공경하였고, 청년시절 욕락을 버리고 출가하여 6년 고행하며, 항상 선정에 들어 마음이 산란스럽지 않고, 얼굴과 몸매가 단정하여 장엄하며, 중생을 조복하기 위하여 일부러 가서 법을 말하되 마음에 교만함이 없는 것을 보면 이는 눈으로 여래를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소리를 듣고 여래를 알아차리는 법이란 보살이 7보를 걸으면서 “이번에 나의 몸이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몸”이라 말하고, 아시타 선인도 합장하고 말하기를, “대왕이시여, 아십시오. 싣달 태자는 결정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요, 출가하지 않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32상 80종호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청년이 되어서는 늙고 병들고 죽은 것을 보고, “이러한 것들을 내가 마땅히 끊으리라.” 하였고, 아라라(阿羅邏)의 오통(五通) 선인에게서 무상정을 받아 성취하고는 “이는 옳지 못하다”고 말하고, 6년을 고행하고도 “이 고행으로 성취할 것이 없으며 바른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성도한 뒤에는 범천이 권청하므로, “내가 모든 중생을 위하여 감로문을 열리라.”하고 바라나국에 나아가 법륜을 굴려서 중도를 설하였다. 스스로 중생을 제도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제도하지 못한 것이 없으니 이를 중도라고 하며, 여래가 온갖 것을 이룬 것도, 이루지 않은 것도 아니니 이를 중도라 하며, 말하는 것이 자신의 이양을 위함이 아니지만 과를 얻지 못함이 없으니 이를 중도라 한다. 이와 같이 바른 말, 진실한 말, 때에 맞는 말, 참된 말을 듣고, 말을 헛되이 내지 않고, 미묘하고 제일이니 이런 법을 들으면 여래의 말씀인줄 알게 된다.

우리는 중생의 삶을 살기 때문에 중생의 안목으로 보고 듣게 되므로 여래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여래의 진실한 설법을 듣지도 못한다. 경에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경을 잘 지니어 우리 마음을 청정히 하고, 경을 읽고 외워서 우리 구업을 청정히 하며, 서사하고 해설함으로써 신업을 청정히 하면 보는 안목과 듣는 안목이 생겨서 여래의 모습과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반경》의 이 법문은 우리가 얻어야할 여섯 가지 안목인 셈이다.

이기운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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