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대사는 “마음을 관(觀)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수행을 총섭(總攝)한다.”라고 하였고, 고덕(古德)은 “심지(心地)가 비고 툭 틔어 막힘이 없는 것이 보시이며, 심지가 청정하여 비루함이 없는 것이 지계(持戒)이며, 심지가 담박하여 시비가 없는 것이 인욕이며, 오묘하고 고요한 이치를 간단없이 비추어보는 것이 정진이며, 확연(廓然)하여 고요함도 시끄러움도 없는 것이 선정이며, 사무치게 밝아 똑똑함도 어리석음도 없는 것이 지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인이 “한 법도 옳다고 정하지 않으며 한 법도 그르다고 정하지 않나니, 거짓을 배척하고 참됨을 도모하며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것은 모두 스스로 자기를 속박하는 것이다. 만약 대도(大道)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한 법이 옳음도 보지 않는데 어찌 한 법이 그름이 있으리오.”라고 하였습니다. 달마대사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규역(規域)이라 하며, 대소승(大小乘)의 기본 내용을 규역이라 하며, 생사와 열반을 규역이라 하나니 범부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성문(聲聞)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보살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내지 부처님의 마음조차 일으키지 않아야 비로소 규역을 벗어났다고 한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여 지옥에 떨어졌더라도 자기의 법왕(法王)을 보면 곧 해탈한다.” 하였고, 또 “깨달음은 한 순간에 있으니, 어찌 백발이 되도록 공부할 필요가 있으랴.” 하였습니다. 육조대사(六祖大師)는 “앞 생각이 미혹하면 중생이요 뒷 생각이 깨달으면 부처이다.” 하였습니다. 또 고인이 “용이 뼈를 바꿈에 그 비늘은 바꾸지 않는 것과 같으니, 범부가 마음을 돌이켜 부처가 됨에 그 얼굴은 바꾸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가장 존귀하여 백천 가지 삼매와 한량없는 묘의(妙義)가 그 사람의 한 생각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고인이 “이 일승법(一乘法)은 듣고 믿지 않더라도 오히려 성불할 종자를 심는 인연을 맺으며,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인천(人天)의 복을 덮는다.” 하였으니, 하물며 들어서 믿고 배워서 이루는 자야 말할 나위 있으리오. 어찌 수행에 뜻을 둔 이가 이를 버리고 달리 찾으리오.

만약 참구하는 수행문(修行門)을 말한다면, 예컨대 “한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묻기를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자, 조주가 ‘없다.’ 하였으니, 꿈틀거리는 생명들은 모두 불성이 있거늘 조주는 어찌하여 없다고 했는가?”라는 화두를 옷 입고 밥 먹고 대소변을 보고 어른을 시봉하고 아랫사람을 가르치고 책을 보고 손님을 접대할 때 내지 행주좌와(行住坐臥)의 모든 때에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거각(擧覺)하고 거각하며 의심하고 의심하며 관찰하고 관찰하며 연마하고 연마하되 세간의 잡된 일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돌이켜 없다는 무(無) 자 위에 두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공부를 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가면 자연히 계오(契悟)할 것입니다. 이는 배고픈 사람이 한 숟가락 밥을 먹고 단번에 배가 부를 수 없으며, 글씨를 배우는 사람이 한 권의 종이에 썼다고 바로 글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견실한 마음을 갖추어 시종 변치 않으면 도를 쉽게 이룰 것입니다.

고인이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한다.” 한 것은 심안(心眼)이 움직이지 않음을 뜻하고, “닭이 알을 품듯이 한다.” 한 것은 따뜻한 기운이 지속함을 뜻합니다.

화두를 들 때에는 마치 물길을 거슬러 돛단배를 젓는 것과 같아서 때로는 냉담하여 아무 재미가 없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속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니, 단지 화두만 거각(擧覺)하는 것이 묘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을 모아서 화두를 들되 너무 급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으며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매우 면밀(綿密)해야 합니다. 숨은 평상시와 같이 쉬고 음식은 적당히 먹으며 눈은 정채(精彩)를 띠고 등뼈는 꼿꼿이 세워야 합니다.

사람의 한 평생이 준마가 틈 사이를 달려 지나는 것처럼 빨리 지나가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고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급하니, 온갖 계책을 다 써서 고생해도 결국에는 한 무더기 해골이 될 뿐입니다. 이 무상이 신속하고 생사의 일이 큼을 생각하여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급급히 서둘러야 합니다. 태어날 때에는 온 곳을 알지 못하고 죽을 때에는 갈 곳을 알지 못한 채 업식(業識)이 아득하고 심기(心機)가 어지러워 마치 땔나무에 불이 붙어 마구 타오르듯이 사생육취(四生六趣)가 가슴 속에서 잉태되니, 어찌 두렵지 않으리오. 만약 진정한 참학(參學)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생사의 업력(業力)을 대적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분명하게 생각하면 공부를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에서 열거해 말한 내용들은 모두 불조(佛祖)의 진실한 밝은 가르침이니 감히 한 마디 언구도 속이지 않습니다. 지난 날 분부한 말씀을 감히 저버릴 수 없어 이제 어리석은 충심으로 이 글을 써서 드립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태한 까닭에 단지 마음 속 생각을 말했을 뿐 글을 다듬는 데 힘쓰지는 않았습니다. 할 말은 끝이 없지만 개략은 이상과 같습니다. 등암장로(藤庵長老)가 법어를 청하기에 이 글을 써줍니다.

達磨大師云: “觀心一法, 總攝諸行.” 古德云: “心地虛曠無滯局, 便是布施; 心地淸淨無鄙屑, 便是持戒; 心地恬淡無是非, 便是忍辱; 妙寂之理, 照無間斷, 便是精進; 廓然無靜鬧, 便是禪定; 明徹無智愚, 便是智慧.” 又古人云: “不定一法是, 不定一法非, 斥妄謀眞, 捨此取彼, 幷是執縛自繩. 若悟大道之人, 不見一法是, 何有一法非?” 達磨大師云: “仁義禮智信, 名爲規域; 大小乘基情, 名爲規域; 生死涅槃, 名爲規域; 不發凡夫心, 不發聲聞心, 不發菩薩心, 乃至不發佛心, 始名出規域外.” 又云: “若人犯罪堕地獄, 自見己之法王, 卽得解脫.” 又云: “悟在須臾, 何煩皓首.” 六祖大師云: “前念迷衆生, 後念悟卽佛.” 又古人云: “如龍換骨, 不改其鱗. 凡夫回心作佛, 不改其面.” 故此法門, 最尊最貴, 百千三昧, 無量妙義, 不離當人一念心塵. 古人云: “此一乘法, 聞而不信, 尙結佛種之因, 學而未成, 猶盖人天之福.” 況聞而信學而成者乎? 豈有志乎修行者, 捨此他求? 若論叅究行門, 如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趙州云: “無.” 蠢動含靈, 皆有佛性, 趙州因甚道無? 着衣喫飯, 屙屎放尿, 侍奉敎導, 看讀迎送, 乃至行住坐臥, 一切時處, 廻光返照, 擧來擧去, 疑來疑去, 察而復觀, 磨而復硏, 將思量世間塵勞之心, 回來秪在無字上. 如是用功, 日久月深, 自然契悟. 如療飢者, 一匙食, 未能頓飽; 學書者, 一卷紙未能成文. 辦堅實心, 始終莫異, 其道易成. 古人云: “如猫捕鼠”者, 謂心眼不動也; “如鷄抱卵”者, 謂煖氣相續也. 擧話頭時, 如逆水張帆, 或冷淡無滋味, 或心頭熱悶, 亦不是他家事, 但提撕話頭爲妙. 最是蘊素精神, 不麁急, 不惰緩, 惺惺寂寂, 密密綿綿, 氣息如常, 飢飽準平, 眼目自好精彩, 脊樑不妨竪起. 人生一世, 如驥駒過隙, 倏如草露, 危如風燈, 用盡百計艱辛, 到頭一堆枯骨. 念此無常迅速, 生死事大, 急急如救頭燃. 生不知來處, 死不知去處, 而業識茫茫, 機關紛綸, 薪火蕩搖, 四生六趣, 胎孕于胷中, 豈不可畏哉? 若未有眞正叅學, 如何抵敵生死業力? 如此分明想得, 工夫不浪失. 如上連絡提牽, 皆是佛祖誠實明誨, 不敢以一言一句相欺. 前日之敎, 不敢辜負, 玆以愚衷. 然以懶惰所致, 秪是提說意相, 不務工硏文字. 說亦無盡, 槪畧如右. 藤庵長老請法語, 以此塗糊.

해설

이 글은 본래 등암(藤庵)이란 승려에게 써준 법문인데, 전문이 너무 길어서 참선을 권면한 뒷부분만 뽑았다.

이 글의 앞부분에서는 마음을 깨달아 알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타력(他力)인 염불에 의지해서 극락왕생을 바라서는 안 되며, 대승계(大乘戒)를 알지 못하고서 계율의 형식에만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자세히 설파하였다. 계율에만 얽매이고 염불 수행에만 치중하던 당시 불교계의 현실에서 참선이 가장 수승한 수행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경허의 선사상(禪思想)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것이 바로 이 글이다.

제자 만공(滿空)이 ‘만법귀일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 화두를 깨쳤다고 했을 때 경허는 “등토시와 부채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라고 물었다. 만공이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라 하자 경허는 다시 “그럼 <다비문(茶毘文)>을 본 적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만공이 “예, 본 적이 있사옵니다.”라고 대답하자 경허는 “<다비문>에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라는 대목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인고?”라고 물었다. 만공이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유안석인제하루’의 뜻도 모르면서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라 하고, 무자화두를 참구하게 하였다.

‘유안석인제하루’는 눈 있는 돌사람이 눈물을 흘린다는 뜻으로 바로 이미 이 연재 첫 번째 글인 <경허행장>에서 설명한 “돌계집 마음속의 겁외가〔石女心中劫外歌〕’와 같은 경계이다. 이는 사람의 마음속에 분별하는 정식(情識)이 일어나되 그 당처(當處)가 본래 공(空)하여 분별이 끊어진 경계이다. 즉 다비할 때 사람들이 본래 정식이 없는 마음에서 정식을 일으켜 눈물을 흘리는 것이 돌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 것일 터다.

《경허집》에서 무자(無字)화두 수행법을 설명한 곳은 이 글 뿐이다. 경허의 이 무자화두 수행법은 만공의 ‘무자화두 드는 법’으로 이어져 한국 참선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자리잡힌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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