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개 같은 내 인생’의 한 장면.

<개 같은 내 인생>(1985)은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한 스웨덴 영화입니다. 북유럽의 아름다운 풍광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길버트 그레이프>를 만든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초기작으로, 레이다 욘손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보스턴 비평가 협회상, 보스턴비평가협회상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제45회 골든글러브상, 골든글러브상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으며, 성장영화 중 최고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12살 소년의 성장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년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는 소년을 통해 인생의 보편적 색깔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아이가 감당하기에 힘겨워 보이는 삶을 지켜보면서 인생의 무게를 경험하고, 또 소년이 그 고통을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수작이었습니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충분히 수긍할만한 답을 주었습니다.

소년 잉그마르(앙톤 글랜젤리우스)는 엄마를 잃고 삼촌 집에 맡겨져야 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어린 시절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일 것입니다. 또 엄마만큼 의지하고 좋아했던 강아지 싱킨과도 이별하면서 잉그마르는 인공위성에 태워져 우주로 날아간 개 라이카를 생각했습니다. 소련이 최초로 인공위성을 개발하고 거기에 떠돌이 개 라이카를 태워 우주로 보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던 것입니다. 소년은 라이카가 홀로 우주를 떠돌면서 느꼈을 두려움이나 절대 고독을 걱정했는데, 이 감정은 바로 사랑하는 엄마와 싱킨, 그리고 정든 집을 떠나 삼촌 집으로 떠나는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주로 날아간 개 라이카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지 않은 것처럼 잉그마르 또한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짐을 싸서 외삼촌 집으로 가고, 여름이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엄마가 돌아가신 후 다시 삼촌 집으로 떠나고, 잉그마르의 삶을 결정한 건 어른들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삶이라는 것은 이렇게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영화에서 제목이 ‘개 같은 내 인생’인데, 여기서 ‘개 같은’이 의미하는 것은, 주인의 뜻에 따라 개의 삶이 결정되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삶 또한 이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어린이의 삶은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되는, 그런 수동적인 삶이었고, 이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감정은 불안과 외로움이었습니다.

잉그마르의 삶이 불행해지기 시작한 건 엄마가 아프면서입니다. 건강할 때의 엄마는 잉그마르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고, 또 바닷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잉그마르는 그 시간들을 자주 떠올렸지만 현실과는 이질적인 기억입니다.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엄마는 어느 날부터 아프기 시작하더니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식사도 형과 잉그마르가 준비해야 했습니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지구 반대편에서 바나나 농사를 짓는다고 했는데, 어쨌든 아버지가 부재한 삶에 엄마는 아프고, 집안 분위기는 음울했습니다.

잉그마르의 삶은 형편없었습니다.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말썽꾸러기로 낙인찍히고, 그렇게 다정했던 엄마는 병이 들면서 히스테리를 부리며 잉그마르를 귀찮아하고, 형은 “너는 쓸모없는 놈”이라고 동생을 비난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잉그마르는 엄마와 강아지 싱킨을 사랑했기 때문에 집을 떠나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아이러니한 면이 있습니다. 그렇게 오기 싫었던 삼촌 집에서 잉그마르는 집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함과 행복감을 경험했습니다. 삼촌 집에서는 모두에게 환영받았습니다. 삼촌은 잉그마르와 얘기 나누는 걸 좋아했고, 병들어 누워있는 할아버지는 잉그마르에게 여성 속옷 잡지를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잘하는 잉그마르는 마을에서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거기다 남자 같은 모습의 여자와 친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잉그마르는 삼촌 집에서 무척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여름이 끝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는 은근히 그 암울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잉그마르가 안돼 보였습니다.

영화는 상반된 분위기를 갖고 있습니다. 푸른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가 있는 풍경은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느낌을 물씬 풍깁니다. 반면에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시기는 북유럽의 쓸쓸함과 적막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여름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은 대체로 밝고 따뜻하고 행복합니다. 반면에 겨울을 배경으로 했을 때는 음울한 분위기만큼이나 삶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자연적 배경의 상징성과 함께 공간적 배경 또한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고 엄마가 병들어 누워있는 주인공 잉그마르의 집은 대체로 삭막하고, 반면에 삼촌 집은 여름처럼 밝은 분위기였습니다. 잉그마르의 집은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고 삼촌 집의 밝은 분위기는 삶의 행복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이렇게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고 말해줍니다.

잉그마르는 여름방학 때 삼촌 집으로 떠났다가 개학하면서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가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다시 삼촌 집으로 떠났습니다. 영화에서는 음울한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두 번, 그리고 밝은 삼촌 집을 배경으로 두 번 살았는데, 행복한 삶과 음울한 삶을 교대로 살았습니다. 삶이란 이렇게 슬픔과 행복이 교대로 다가온다는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잉그마르의 삶을 결정한 것이 어른들이었듯 행복과 슬픔이 반복되는 인간의 삶의 조건 또한 우리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이러한 인생설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덜 고통 받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영화의 주인공 12살 소년 잉그마르는 우리에게 답을 찾아주었습니다. 아이처럼 사는 것이었습니다. 늘 장난기 가득한 눈빛을 빛내던 잉그마르가 소리죽여 우는 장면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삼촌 집에서도 방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할머니 집으로 가게 되고, 또 사육장에서 잘 있는 줄로만 알았던 개 싱킨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잉그마르는 정말로 우주로 날아간 개 라이카의 고독과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그저 우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북극의 추운 겨울 밤 소년은 어두운 나무 집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습니다. 아침이 올 때까지 잉그마르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고, 삼촌이 와서 잉그마르를 달랬습니다. 그런데 그 달래는 방식이 우는 아이에게 사탕 준다는 말에 딱 어울리는 처방이었습니다. 소년이 감당하기 버거워 보이는 삶의 무게를 지고 밤새 울었던 소년은 삼촌이 마을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으니까 얼른 가자는 말에 아이답게 일어나 삼촌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 순간 삶의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소년의 가슴에는 더 이상 슬픔도 고통도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소년의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개의 죽음, 엄마의 죽음, 어린 마음에 새겨진 상처, 그렇지만 이런 것은 과거이고 지금 잉그마르에겐 재미있는 구경거리와 따뜻하고 섬세하게 보살펴주는 삼촌이 있고,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 친구도 있고, 지금은 이런 재미있는 것들이 현실이고, 중요합니다. 잉그마르는 아이답게 그런 나쁜 감정을 금방 털어버리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영화는 끝났습니다.

영화는 아이의 성장을 통해서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삶이라는 게 슬픈 것만도 외로운 것만도 아니고, 또한 마냥 행복한 것만도 아니라는, 익숙한 진실을 말하지만 이 메시지가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을 보다 쉽게 살기 위해서는, 삶의 어떤 조건에도 연연하지 않고 아이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일러 주었습니다.

김은주 | 자유기고가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