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한 청년이 돈을 벌어 재벌이 되고자 했다. 그는 재벌이 되기 전까지는 고향도 그리고 부모님도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사람 일이 뜻대로 되겠는가. 세월은 흐르고 결국 재벌도 되지 못했고 근근이 살아가는 신세로 전락해 뒤늦게 고향으로 돌아가니 부모님은 아들을 그리워 하다가 세상을 이미 떠나신지 오래였다. 어리석은 과거를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멎지 않으니 뜻대로 되지 않는다’ 효도를 하려고 해도 부모가 살아계시지 않는다는 의미로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말이다.

<불씨잡변>에 정도전을 비롯한 많은 유학자들이 불교를 공격하는 부분에 있어 ‘공병(空病)’을 지적한다.

한마디로 ‘승려들은 깨닫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하려고 하는 의지조차 없는 무능력자’라는 것이다. 생산적인 육체적 활동에 기여하거나 나라를 위해 어떠한 것도 하지 않는 이들이 무리지어 검증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고준담론만 이야기하고 실제적인 노력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공병은 숙명론, 운명론 그리고 공업론과 맞닿아 있다. 숙명론, 운명론으로 인해 생긴 사회적 부작용으로 불교적 윤회론을 극단적으로 비판한다. 과연 이런 비판들이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며 현재 진행형이다.

무슨 일만 있으면 ‘오온(五蘊)이 공하다’고 하면서 뒤로 물러나 책임을 회피하고, 비판을 두려워하며, 개선의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숙명론과 운명론 아닌가? 오온이 공한 것을 제대로 안다면 두려움도, 일체의 고통도 사라진다는 <반야심경>의 의미를 어찌 이런 식으로 곡해해서 쓰는지 안타깝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각각 저마다의 장단점이 있다. 그 부족함을 알기에 끊임없이 수행을 하고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무리지어 승단을 이루고 함께 공부한다. 그런데 저절로 완전무결 해지기만을 기다린다면 언제 깨달음을 이루어 언제 보살행을 할 것인가?

《화엄경》과 <삼보통청 축원문>에 이르길 ‘세세상행보살도世世常行菩薩道 구경원성살바야究竟圓成薩婆若’라는 말이 있다. 화엄회상의 대보살조차도 완전한 깨달음을 미루고 계속 윤회를 거치면 보살도를 한 뒤에 구경의 정각을 이루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초기불교든 대승불교든 ‘알아차림’, ‘깨어있음’를 강조한다, 이것은 관(觀)이라고 하기도 하고 각(覺)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는 깨어 있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고 참선(간화선), 염불, 기도, 주력 등 여러 방편을 통해서 지(止, 삼매)가 생기고 관(각)이 더욱 뚜렷해지며 순간순간 정(定)을 이루고 거기서 지혜(慧)가 밝아지는 것이다. 지혜가 부족하다면 더욱 분발하고 더 지혜가 생길 수 있게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돈성무상최정각頓成無上最正覺 광도법계제중생廣度法界諸衆生’ 문득 순간의 무상최정각을 이루어 법계의 모든 중생을 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순간순간 깨달아 법계의 중생을 끊임없이 모두 구원하겠다는 것이 대승의 가르침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나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논쟁보다는 대승의 본뜻은 돈오(頓悟), 즉 수많은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라 하겠다.(돈오즉도중頓悟卽度衆)

필자는 대학시절부터 10년 동안 담배를 핀 적이 있다. 이제 금연한지 12년 정도 되었다. 담배를 끊는 것이 2년 동안 7번의 시도 끝에 성공을 하였다. 중간에 실패한 여섯 번의 기회는 무의미 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실패하더라도 횟수를 더 하다보면 더욱 금연에 노하우가 생기고 끊기 위한 새로운 방법과 담배중독의 원리를 알 수 있다. 그렇게 반복해서 시도하다 보면 끊을 수 있는 것이다. 시도하고 실패했던 경험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의지만 있다면 어떤 것도 가능한 것이다. 하물며 담배 끊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만은 마음을 밝히고 깨달음을 구하는 일은 이와 다르겠는가. 더 많은 노력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이다. 시행착오를 하기 싫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앉아만 있겠다 하는 것은 돌을 갈아 거울을 만드는 것과 목불을 태워 사리를 찾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가 재벌로 성공한 후에만 부모를 봉양하고 금의환향하겠다는 어리석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깨달음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자기가 처해져 있는 곳에서 항상 자신을 살펴보고 작던 크든 육바라밀이라는 보살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예전 스님과 조사들은 공과격(功過格)을 만들어 그날의 선행과 죄를 매일 기록해 육바라밀을 생활속에서 실천하려 노력을 하였다. 자신을 밝힌다며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외면하고 미루면서 그러한 행태를 부처님의 말씀으로 합리화한다면 부처님은 피눈물을 흘리실 것이다.

종단과 한국불교는 내우외환에 직면해 있다, 바깥으로는 기독교를 비롯한 다불교의 도전속에 내부는 세속화와 파계. 그리고 사부대중의 분열로 인해 끝이 보이지 않는 치킨게임을 하고 있다. 어쩌면 이제 스님은 사표가 아니라 직업인 중의 하나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 분열의 책임은 승단에 있고 부패와 파계의 문제를 초기에 해결 못하고 숨기기에 급급하여 이제는 큰 불길이 되어 불교 전체를 태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예상컨대 이런 식으로 2~3 년만 지나면 불교 신자들은 더욱 기하급수적으로 줄어 들 것이다. 하물며 깨달음을 추구하는 승가집단이 이처럼 수수방관하며 남의 일인양 보고만 있고 외면하는 태도가 재가신도로서 안타까움에 가슴이 답답한 지경이다. 재가신도는 떠나면 그뿐이지만 승가는 그 위기와 존치에 당사자임을 직시해야 한다.

종단에서 그리고 선사들이 주장하는 간화선이 ‘최상승선(最上乘禪)’이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려 한다면 생활 속에서 진정 실천의 모습으로 표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말그대로 직지인심이라면 사실 수행에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도 않을 것이다.

선사들과 제방선원의 모든 분들께 묻고 싶다.

이 어지러운 시대에 간화선과 조계선풍은 어떤 식의 자비로 실천되고 표현할 것입니까! 지금 보여주는 여러분의 간화선이 왜 대승인가를 증명해주시길 바랍니다.

추신) 제2회 간화선 대법회에 7일동안 저는 현장에서 그리고 지면과 방송으로 접하였습니다. 성황리에 법회가 여법하게 이루어짐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지금의 일방적인 법회보다는 선풍을 진작하고 정말 간화선 법회가 모든 이의 주목을 받고 더욱 성공하려 한다면 출, 재가가 난상에서 선문답이 이루어지는 무차선 대회가 된다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보송 배종대 · 전 바른불교재가모임 대구지회장 

<이 칼럼은 본지 제휴사인 불교닷컴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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