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비 몇 방울과 함박눈 큰 술 두 스푼을 지나가는 산들바람에 버무리면 마음이 환해지던 때가 있었다. 새들의 노랫소리 맑은 숲처럼 그렇게 화사한 시절이다.
   삶은 인간에만 가혹할까? 햇살 아래 모든 게 익어갈 때 사람 어깨에도 싸라기가 하얗게 쌓이는데, 유독 인간만은 살수록 거무튀튀 어둡고 초라해 보인다. 늙다는 낡다와 같은 말이던가.

   지난 여름도 혹독했다. 태풍은 어김없이 거센 바람과 폭우를 몰고 왔고 폭염은 또 얼마나 길던지! 땅도 하늘 따라 같이 울고 말았다. 계속되는 지진에 땅 또한 단 일주일도 쉬는 날 없이 흔들리고 또 흔들렸으니까. 그러고 보면 사람만이 힘든 건 아니다.

   선선한 바람은 문득 설악산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다. 다시금 세상이 반짝인다.
   사과알에 붉은 별이 켜질 때 가을물색 바닷가 들판은 노랗게 피어날 거다. 홍등불이 산불 번지듯 온 산을 밝히면, 울긋불긋 등산객은 가을전시회장으로 쯔나미처럼 밀어닥치겠지.
   하늘이, 땅이 무슨 짓을 하든지 얼음을 녹여 봄을 부르고, 불볕을 밑불삼아 안으로 제 안으로 여름이 무르익으니 열매가 풍요롭다. 가을이 아름다운 건 넉넉한 보시(1) 때문 아니겠는가.
 
   싱싱했던, 시대의 수레를 끌던 사람들은 낡은 바퀴 신세로 썰물을 타는데, 참된 자기본성을 만나보긴 했을까? 오늘도 몰래 밥 한 끼 더 챙기려다 그만 천상세계와 또 멀어졌을까?
   질투(5)하고 분노(1)하다 시간을 버리고, 어리석음(3)에 자만(6)하다 삶을 놓치니 지옥 아닌가.
   천상계를 상상치 못하는데 어찌 선뜻 비울 수 있으랴. 곡기를 딱 끊어버리듯이 자발적으로 물을 거절하고, 푸른 이파리를 곱게 말려서 단풍으로 되살아나는 이치가 매년 말한다.
   그 세상을 알고서야 여기가 다 인양 살 리 없다고. 상상력이 부족하면 사람은 낡고 만다.

   엄도경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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