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처마립간’으로도 불려…자비마립간의 큰 아들
천정정은 신탁 받는 곳, 신궁 이용 정치세력 통합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소지왕(炤智王)이 즉위 10년인 488년 무진(戊辰)년에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하였다.

479∼500년에 재위했던 소지왕은 신궁(神宮)과 우역(郵驛)을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백제와 혼인을 맺어 동맹을 더욱 공고한 것으로 유명하다. 18대 실성왕 다음에 19대 눌지왕과 눌지왕의 아들인 20대 자비왕을 넘어서 자비왕의 아들이자 눌지왕의 손자인 소지왕 기사가 나왔다. 왜일까?

소지왕은 비처마립간(毗處麻立干)이라고도 하는데 성은 김씨(金氏)다. 자비마립간의 큰 아들로, 어머니는 김씨 서불한(舒弗邯) 미사흔(未斯欣)의 딸이다. 왕비는 이벌찬(伊伐飡) 내숙(乃宿)의 딸 선혜부인(善兮夫人)이다. 흥미로운 것은 미사흔이 눌지왕의 형제로서 일본에서 제상의 덕으로 귀국한 사람이다. 미사흔의 부인이 제상의 딸이었던 것은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이 미사흔의 딸이 소지왕의 어머니라는 점이다. 제상의 외손이라는 뜻인가?

소지마립간 대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변경 지방을 자주 공격하였는데 신라는 백제, 가야야 연합해 이하(泥河)·모산성(母山城) 전투에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특히 493년에 백제 동성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내 결혼 동맹을 맺었다. 494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입했을 때는 백제가, 495년 백제를 공격했을 때는 신라가 각각 구원병을 파견해 고구려의 남하를 강력하게 저지하였으며, 변경 지방의 요충지에는 삼년산성(三年山城 : 지금의 보은) 등을 증축해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결국 내물왕 이래로 신라를 좌지우지했던 고구려 세력을 몰아낸 것이 소지왕이기에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스님은 이에 주목해서 ‘소지왕’ 조를 남긴 것일까?

소지왕이 행차한 천정정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까마귀와 쥐 이야기를 보면, 점집이 맞다. 다만, 그냥 점집이 아니라 왕이 가는 점집이니, 어려운 말로 ‘신탁(神託)’을 받는 곳이라고 보면 좋겠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상징적인 수반인 달라이 라마도 네충사원에 가서 매년 신탁을 받는다. 이처럼 신라시대에도 그랬을 것 같다. 그럼 어디였을까?

소지왕의 신궁을 만든 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조묘나 다른 종교 신앙 조직이 있었을 당시에 ‘신궁’을 만든 것 자체가 ‘신궁의 세력’을 이용해서 종교세력을 통합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까닭에 천정정은 ‘신궁’의 한 정자로서 신탁을 받는 곳 가운데 하나라고 보면 어떨까?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에는 “신라 소지왕 10년 정월 15일에 왕이 천정천에 행차하였다”고 하여 《삼국유사》의 기사보다 자세한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대보름에 신궁에서 신탁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는 부분이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우는데, 쥐가 사람말로 이르기를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했다. 혹자가 말하기를 신덕왕(神德王)이 흥륜사(興輪寺)에 행향(行香)하고자 하여 (가는데) 길에 꼬리를 (서로) 물고 가는 한 무리의 쥐들을 보고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돌아와 그것을 점치게 하니 ‘내일 먼저 우는 까마귀를 찾아가라’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이다.

까마귀는 고구려 벽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삼족오(三足烏)이다. 도교나 선교의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불사조인 금시조의 변화형으로 보면 이해가 쉽다. 태양 가까이 날아서 날개가 선탠을 해서 탄 것으로 형상화시킨 생물로 보면 될 것이다. 용봉 가운데 봉황의 변화형이 닭으로 12지의 하나가 된 것과는 좀 다르다. 내년 2016년 정유년은 닭의 해이며, 쥐는 12지 가운데 첫 번째라는 점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십이신장(十二神將) 또는 십이신왕(十二神王)이라고도 한다. 《약사경(藥師經)》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神將)이다. 이들은 열두 방위(方位)에 맞추어서 호랑이·토끼·용·뱀·말·소·원숭이·닭·돼지·개·쥐·양 등으로 도교(道敎)의 방위신앙과 오행사상에서 강한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왕능 등에는 12지신이 많이 새겨져 있다. 그만큼 신라에 12지신 신앙이 성행해서 왕가도 이 신앙에 동참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 가운데 첫 번째인 쥐가 나타나 까마귀를 따라가라고 한 것은 토속신앙세력 가운데 12지신을 섬기는 무리들이 까마귀 즉 금시조를 모신 신궁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복속된 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닐까? 용봉문화인 닭을 포함한 12지가 금시조를 따르라고 한 것 자체가 신궁의 절대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 이 글은 일연 스님이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는 필자의 견해에 따라 원문을 재해석하고 현대적 관점을 부여했다. 《삼국유사》자체가 일연 스님의 제자들을 포함한 후대인들에 의해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원문(밑줄) 내용 일부를 조목 안에서 순서 등을 재배치하는 등 바꾸었음을 알린다.

하도겸 | 칼럼니스트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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