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 역사에 적바림된 반란사건 가운데 가장 오래 끌었던 것이 서경전역(西京戰役)이다. 열석 달 동안 이어졌으니 서경 인민들 앙버티는 힘이 얼마나 거세찼던 것인지 알 수 있는 일이다. 김부식(金富軾)이 사로잡아 죽인 서경 사람이 1천 200여 명이라고 하는데, ‘비공식’으로 죽인 사람은 적어도 그 세 곱은 넘을 것이다. 어쩌면 서경사람 얼추를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 ‘진실화해위원회’라는 데서 “군경에 학살된 보도연맹원이 4천 934명”이라고 널리 알렸지만, 참으로는 그 오륙십배 위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때에 중들이 꾸는 꿈은 부처가 되어 중생들을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이끌어 주려는 것보다 먼저 국사가 되고 왕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 글에 나오는 ‘중’은 그때에 썼던 말로 요즈막 쓰는 비칭(비칭)이 아님-필자> 유가(儒家) 먹물들 못지않게 ‘권력의지’가 억센 불가(佛家) 먹물옷들이었다. 그것은 고리왕조가 끝장날 때까지 질기굳게 이어져 내려갔으니, 공민왕이 ‘쯩’ 있는 중인 태고보우(太古普愚)를 내치고 떠돌뱅이 무쯩 중인 변조신돈(遍照辛旽)한테 권세자루 맡겼던 까닭이었다.
중들이 꿈꾸는 ‘권력의지’라는 것은 그러나 개경을 사북으로 하여 이름난 중들이 근터구 삼는 유명짜한 절들 경우였고, 이름 없는 외방절에 사는 중들은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베를 짜 팔거나 잣단 장사를 하고 동냥을 해서 목숨줄을 이어나갔다. 이들이 바로 서경전역을 일으킨 외방중들이었고, 이들 도꼭지가 바로 묘청이었던 것이다.
묘청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을 때 고리모둠살이 사상철학 동네를 쥐락펴락하던 불교두럭은 선종 · 화엄종 · 법상종 · 천태종이었다. 그런데 묘청은 이 가운데 어떤 두럭에도 달려 있지 않았다. 지배계급을 정신적으로 안받침하여 주기 위한 사상철학을 만들어 주는 이른바 정통불교쪽 중이 아니라 떠돌뱅이 ‘무쯩중’으로 보는 까닭이다. 200여 년 앞 전배 중이었던 궁예와 마찬가지로 수원승도(隨院僧徒)였을 것이다. 제 땅에서 쫓겨나 떠돌다가 밥이나 먹으려고 이름난 중들 심부름꾼으로 들어간 농군들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이 내세웠던 깃발 또한 지옥인 오늘 여기를 그대로 뒤집어 극락세계로 만들자는 미륵사상이었을 것이다. 혁명승려 동아리인 그들이 낭가(郞家)쪽 사람들과 손잡아 일으킨 것이 서경전역이었던 것이다.
중국과 맞먹는 황제나라인 대위제국(大爲帝國)을 세웠으나 묘청은 황제자리에 오르지도 않고 무슨 벼슬자리를 목에 걸지도 않는다. 선언문부터 읽는 판이었으므로 그럴 겨를이 없기도 하고 나랏몸 틀거리를 밑뿌리에서부터 바꾸자는 데서 비롯된 개국(開國)이기도 하였지만, 처음부터 권세자루를 잡아 보겠다는 속된 욕망이 없었던 것으로 봐야겠다. 그리고 인종(仁宗)한테서 삼중대통(三重大統) 지루각원사(知漏刻院事)라는 벼슬자리 받은 미륵승 묘청이 목대잡는 서경전역에서 중들 이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는 미좇는 중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이름자마저 변변하지 않은 허접한 수원승도, 곧 ‘무쯩중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어내야만 비로소 서경전역 참모습이 보인다는 생각이다. 짜장 무엇을 일러 역사라 부를 것인가?
정심(淨心)스님 묘청을 따랐던 것은 ‘밥풀떼기’들이었으니, 그때나 이제나 썩고 병든 세상을 둘러엎는 싸움에 나서는 것은 더 이만 빼앗길 것이 없는 밑바닥 중생들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자취만을 보더라도 4·19때 그러하였고 5월광주 때 그러하였다. 이른바 청년학도며 먹물들이 채잡아 일떠선 학생혁명 · 시민혁명이라지만, 맨 앞장에서 죽기살기로 싸웠던 것은 전과자 · 깡패 · 행상 · 창녀 · 작부 · 떠돌뱅이중 · 노름꾼 · 양아치 · 운짱 · 리어카 뒷밀이꾼 · 구두닦이 · 목욕탕 때밀이 · 지게꾼 · 날품팔이 · 외판원 · 청소부 같은 더 이만 빼앗길 것이 없는 맨 밑바닥 무쯩 중생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이름 없는 밥풀떼기들이므로 무슨 유공자 명단에 오를 수 없으며, 역사라는 이름의 비정한 강물은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