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공부하는 자세로 가련다”

 

큰스님들의 행적을 쫓다보면 승속(僧俗)을 초월해 있음을 볼 때도 있고, 선사(禪師)니 강사(講師)니 하는 구분이 오히려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진리와 진실이 어디 때와 장소를 구분지어 빛을 발하는가. 우화 스님의 행적은 이와 같은 경계를 무색케 한다. 심지어 불가(佛家)의 승려가 아닌 순진한 속인이라고 해도 무방한 듯하다. 삶 자체가 도인의 행각이었다.  스님은 만공·성철·전강 스님과 같은 한 시대의 대장부들과 함께 했으면서도 그 면모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우화(雨華, 1903~1976·사진) 스님은 1903년 전남 담양군 무정면 성도리(成道里)에서 태어났다. 출가는 14세 때 경남 함양 영각사에서 영명(靈明) 스님을 은사로 모시면서부터였다. 이유는 아버지의 구박 때문이었는지,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무상(無常)을 느꼈기 때문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출가 이후 스님은 해인사 강원에서 내전(內典)을 공부했고, 금강산 마하연과 오대산·묘향산 등에서 화두를 참구하였다. 충남 예산 정혜사(定慧社) 만공 스님 회상에서 정진할 때다. 하루는 만공 스님이 대중 스님들에게 “용맹정진한 것에 대해 한마디씩 하라”고 하였다. 이때 스님은 “본래 무생(無生)인데 용맹정진이 어찌 따로 있으리오”라고 했고, 함께 공부했던 성철 스님은 “미륵불을 보고 왔지요”라고 했다. 만공 스님은 정진대중 가운데 성철·우화 스님 두 스님만을 인정했다고 한다. 1946년 만공 스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  스님은 다음과 같이 그 감회를 읊기도 하였다.

雪浮靑山(설부청산)
一峰獨露(일봉독로)

푸른 산에 함박눈이 내리니
한 봉우리가 길이 되었다.

스님은 1937년 천성산 내원사 동국제일선원에서 운봉(雲峰) 스님에게 우화당(雨華堂)이라는 법호를 받기도 하였다. 운봉 스님은 우화 스님이 다른 스님과 법거량하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는 법제자로 삼은 것이다. 당시 운봉 스님은 “금일 도원(道元) 정상에 우화(雨華)가 만지(滿指)로다”라고 우화 스님을 칭찬하셨다. 우직하고도 순일한 수행자세가 어느덧 부처님의 골수를 취하여 무르익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이와 같이 당대의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오(大悟)는커녕 소오(小悟)도 못했다”고 겸손하게 공부의 경계를 말했다. 법문을 청할 때도 역시 아는 것이 없다하여 사양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수좌는 참선에 들어 열심히 화두를 살피는 것이 공부”라고 강조하였다. 특히 제자에게 “화두는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고 또 배우는 것도 아니며 자기가 해야 돼”라고 하였다. 비록 행색은 소박한 촌노(村老)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준엄한 자기질서와 함께 장부가 가야할 길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의미다.
우화 스님과 절친했던 일타 스님은 생전의 스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스님은 과묵하시고 단순 담백하시니 스님의 모습을 보는 이나 음성을 듣는 이가 누구나 마음에 편안함을 느끼게 하니 사람들은 모두 천진도인 스님, 천진불(天眞佛)뵈러 간다고 하였다.”

해맑은 미소로 유명했던 이 천진불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조차도 드러내길 꺼려했다. 실상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그려지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뭍 중생들을 속이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해서다. 실상조차도 그것은 상생(相生)이 아니라 공멸(共滅)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도 “수행자는 상대편에게 불쾌감을 주면 안 되는 거여”라고 했을 정도로 깔끔했다. 이런 부류의 수행자들은 한 세상 이름 없이 살다가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고 가기를 바라는 부류다. 세속의 기준으로는 아주 고약하고 인정머리 없는 노인네들이다. 그러나 허허롭게 살다 가고 싶은 수행자들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살다 간 흔적 남기지 않고 왔던 자리 그대로 돌아가길 원한다. 때문에 스님은 자신을 찾아 온 수좌들에게 허름한 일꾼의 행색으로 자신을 감춰버리곤 했다. 본분사만이 자신의 삶의 전부일 뿐이다.
스님이 대웅전 부처님께 올릴 향을 사기 위해 나주에서 부산까지 직접 갔다 온 일화는 좋은 사례다. 상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고 모시는 늙은 수행자의 조촐한 즐거움인 것이다.  스님은 매일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하루 종일  눕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한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방석으로 다리만 가릴 뿐이었다. 그리고 스님은 절대 모기를 잡는 일이 없었으므로 스님 방에 들어 선 모기는 실컷 포식을 했다. 이 모두는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이지만, 한편으로는 수행자가 누리고 살아가야 할 행복인 것이다. 스님은 행하기 쉽지 않은 ‘의무’를 즐길 줄 알았던 도인이었던 셈이다.
도인에게서 수행과 깨달음은 팽팽한 줄다리기나 기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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